마가복음 9:2-13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 엿새라. 일주일이  아직 안지났다는 얘기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아직 생생할 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엿새 후 라는 표현을 넣은 것 같다. 아니면 안식의 시간을 염두에 둔 것일까?

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형되셨다. 예수께서 입으신 옷은 세상이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져 광채가 났다. 그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했다. 그것을 보던 베드로는 예수께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세분을 위하여 초막을 짓겟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몹시 무서운 (놀란, 정신나간) 상태였다. 그때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라’ 라는 소리가 났다. (틱. 최면?에서 깨어나)  세 제자가 둘러보니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다. //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치셨던  예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몸을 (혹은 영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적어도 세 제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맛보았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이 율법(모세)을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또 구약의 말씀(엘리야)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교훈하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베드로는 율법이든, 선지자의 말씀이든, 예수님의 가르침이든 상관없이 영광가운데 머물고 싶어했지만, 하늘의 음성은 모세나 엘리야가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최상위 법이다.)

9-13 예수께서는 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로 오신 자신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변화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세 제자는 부활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예수께 물었다. 그런제 제자들은 부활대신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이 어찜인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만 아느냐? 사람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르느냐? 라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 제자에게 엘리야가 왔지만 말씀대로 사람들이 엘리야를 함부로 대우했다고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는 변화산 사건을 사람의 아들로 오신 자신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잠잠하라고 경고하셨다. 세 제자는 부활을 궁금해 하면서도 부활에 대해 직접적이지 않은 엘리야에 대한 얘기를 왜 꺼냈을까? 세 제자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보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말씀이 엘리야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까? 라고 물었던 것일까? 예수님의 대답도 동문서답이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다는 말씀이 기록된 것도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멸시를 받으실 것이라는 말씀도 예언되었다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다는 엘리야가 성경대로 이미 왔다고 하신다. 세례요한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엘리야가 그리스도 보다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는 것도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실 그리스도의 길을 요한이 먼저 걸어갔다고 하신다.

>> 부활의 영광은 온전히 예수께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 전에는 많은 고난과 멸시가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다. 심지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사명을 담당했던  세례 요한의 길도 (엘리야의 길도) 섬김을 받았던 길이 아니라 함부로 대우함을 받은 길이었다고 말씀하신다. 부활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고 구원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영광이다. 부활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아닌 자신(예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것이라고 변화산에서 보여주시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가르쳐 주신다.

>>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 너머에 있다. 여기가 좋사오니가 아니다. 율법말씀과 예언의 말씀과 말씀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산을 내려와야 한다. 산상수훈은 산위에 앉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고,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다. 교회당 (예배당)에만 안주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의 복음을 들은 자는 예수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며 부활의 영광에까지 이르러 참된 안식을 누리라고 하신다.

어렵다.

마가복음 8:27-9:1

27-3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 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고 그리스도의 길(일)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이 질문을 던지셨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1) 세례요한 2) 엘리야 3) 선지자 4)그리스도]. 빌립보 가이사랴는 예루살렘과 아주 멀리 떨어진 갈릴리 바다보다 더 북쪽 마을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생각은 여전히 예루살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베드로가 눈치빠르게  4번을 찍었다. 잘 찍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서는 무지한 제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길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1-33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집착해 예수를 붙들고 (죽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항변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과 부활이었다. 부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당연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반응은 그리스도의 길을 가시는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의 계략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34-38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제자들과 함께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요,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복숨을 잃음으로 구원받는 길이라고 하신다. 천하보다도 목숨이 귀중하며, 목숨보다 예수와 복음이 유익하다고 하신다. 사람이 그 무엇과도 자기 목숨을 바꾸지 않겠지만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는 자기 목숨을 버리하고 하신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예수와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 하나님의 일이란 성자 예수님 처럼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도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복종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천하보다 생명이 중요하고 생명보다 예수와 복음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와 하나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보다 귀한 영생이다.

9: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 무리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말씀하신다. //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다 본다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열한 제자는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했다는 것은 적용하기 쉽지 않은 표현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성령강림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제자들도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하나님나라 온전히 깨닫고 (성령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였음을 본 증인이 된다.  결국 8장 마지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길이란, 곧 하나님나라에 권능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 천하보다 생명이 귀하고 생명보다는 예수와 복음이 귀하다. 예수와 복음이 영생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복음이 하나님나라다. 육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8:1-26

1-9 칠병이어 기적. 예수님이 큰 무리를 먹이시는 것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와 다르게 무리를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굶겨 집으로 보낼 수 없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먹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돈을 핑계삼는 것이 아니라 환경, 곧 광야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고 예수님께 대답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게 하셨다. 약 4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께서는 배부른 그들을 흩어보내셨다. // 오병이어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번에도 무리들이 배불리 먹자 무리들을 바로 흩어 보내셨다. 예수님의 사역이 ‘밥퍼’ 사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루 이틀 지나도 예수님이 밥퍼 사역을 하지 않자, 어쩌면 일정수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떠나 갔을 것이다. 그래서 무리의 수가 오천에서 모자란 사천이라고 상징적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이사건은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는 천국복음을 소개한다. 오병이어 때도 그렇고 무리를 먹이시는 사건은 거두는 사건이다. 분명히 먹였으면 없어져야 하는데 남은 조각을 거둔다. 무엇을 거두었다는 말일까? 예수님은 떡을 축사하시고, 물고기를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셨다. 그러니 축사와 축복이 남은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복은 나누어 줄 수록 남는다고 교훈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가는 이 사건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가복음 독자들을  위로한다.

10-13 칠병이어로 약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헐뜯으며, 표적을 보이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는 표적을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배를 타고 다시 건너편으로 출발셨다. // 다시한번 자기 의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을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이방 사람들과 대비시킨다.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는 것보다 더 큰 표적이 어디 있으랴. 믿음이 없이는 바리새인들 처럼 눈앞의 표적도 볼 수 없다.

14-21 급해서였을까? 제자들은 먹을 것을 배에 싣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배에는 떡이 하나밖에 안남았다. 제자들이 먹을 것에 대해 염려하자 예수님은 경고하여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먹을 떡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오해했다.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제자들의 마음이 돌밭이 된 것, 둔해진것을 책망하신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기억도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열두바구니 칠병이어로 일곱 광주리를 남긴 사건을 기억하게 하신다.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거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파와 헤롯당은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22-26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와 예수께 만져주시길 구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안수해 주시고 고쳐주셨다. 첫 안수에 이 맹인은 사람들이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다시 안수했다. 그는 완전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 예수님은 배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라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셨는데, 벳새다에 도착하셔서 한 맹인을 고쳐주셨다. 두번이나 안수 하신 것은 하나님나라를 희미하게 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밝히 봐야 함을 교훈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혹은 육적인 눈을 뜨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뜨게 하셨다는 것일까? t세상 만물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는 것, 예수님을 아는 것이 완전히 낫는 것이라는 교훈일까?

>> 예수님은 맹인을 고쳐주시고 그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맹인이 육적인 눈을 뜬 것만을 보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지 못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힐난하게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마가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은 드러났고 예수님의 얼굴도 알려졌다고 선언했었다. 예수님의 사역이 대중적인 축귀와 치유에서, 더이상 대중 앞에서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은밀한 축귀와 치유로 바뀐 이유라고 생각된다. 복음은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여전히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마가복음 7:24-37

24-30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다. 예수님이 쉴 겨를도 없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먹게 해야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셨다. 여자는 주님 말씀이 옳지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여인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하시며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고 하셨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예수님은 이방 사람들에게로 가셨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영광은 이방에서도 가려지지지 않았다.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태는 동일한? 사건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이방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고 기록한다.

31-37 예수님은 두로에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다. 군대귀신을 쫓아내시고 배척 당해 직접 가보지 못한 데가볼리에 (열 고을에) 결국 가셨던 것 같다. 갈릴리 호수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은 이어졌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은 이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에바다’ (열려라) 하시며 귀와 입을 열어주셨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데리온 자들과 치유받은 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나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다.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예수가 모든 것을 잘하였다고 칭찬했다. 못 듣는 사람을 듣게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는 분으로 소문이 났다.

//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끝내 복음을 배척했다면 이방 지역에서는 마침내 복음을 환영했다.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그곳 사람들의 배척에 먼지를 털고 배에 다시 오르신 것이 얼마전인 것 같았는데… 마가는 복음이 이방지역에서는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오히려 환영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큰 믿음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음이 적은 (없는), 곧 예수님의 친절한 설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과도 비교된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개에 비유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만큼 큰 믿음이 있었다. 이 여인은 마음의 귀가 열린 사람이었다.

// 한 이방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다는 것은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새번역)”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바울은 ‘마음으로 믿어서’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개역개정)” 라고 해설하고, ‘입으로 고백해서’ 는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끝까지 퍼졌다” 라는 성경말씀으로 설명한다. 마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스라엘을 만나주고 불순종 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정작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된 것은 이방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  사람들이 심히 놀라 예수님이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라고 소문내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끝난다.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창세기 1장 마지막 절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보시기에 참 좋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을 심히 좋게 창조하신, 곧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 캄보디아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내려졌다. 학교뿐만 아니라 당연히 종교시설에도 적용된다.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물로 드려지는 합당한 예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이웃사랑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7:1-23

1-8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몇이 예수님을 보려고 모였다. 그들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았다. 마가는 친절하게도 유대인들은 전통, 곧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을 담는 그릇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고 따졌다.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용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자신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외식히며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불렀다는 얘기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히려 너희가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냐고 반문하셨다.

9-13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통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예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렸다는 핑계로 부모봉양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하신다. 고르반뿐 아니라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을 많이 행하고 있다고 책망하신다.

14-23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불러 (아마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집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물었다.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설명해 주신다.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갔다가 배설하는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신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사람 마음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 이들은 깨끗함과 부정함을  장로의 전통에서 찾는다. 앞 3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던 서기관도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했었다. 예루살렘은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 하는 옛 포도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갈리리는 변방이지만 하나님나라의 도를 담은 새 부대라고 할 수 있겠다.

//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의 계명이냐 사람의 전통이냐다. 답은 정해져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뻔한 답이 있음에도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으로 눈에 보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도자가 깨달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 으로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꾀를 낸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 자신들이 앉는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이요 악한 것이라고 하신 이유다. 무너뜨려야 할 이론이 너무 많다. 무너뜨려야 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정말 많다.

>>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좋은 땅인 이유는 예수님이 친절하게도 가르침을 설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살아 있는 진리의 말씀을 죽은 전통과 관습을 뒷받침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대로 정직하게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