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1-20

1-2 (배경/무대)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는 반대편 거라사인 지방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시는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난다. // 예수님이 건너가고자 한 곳이 돼지치는 이방인들이 많은 곳이었다면 제자들이 싫어했을 법도 했겠다. 게다가 갈릴리 바다를 가로지르는 동안 광풍까지 일어나고 더군다나 처음 맞아주는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이니. 그것도 귀신 이천명이 달라붙은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나라 복음이 침노할 수 있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보이는 그런 곳으로 예수님은 오셨던 것이다.

3-13 (사건) 무덤이 이 사람이 사는 거처로 사람들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쇠사슬로도 제어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셌다. 이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는 무덤 사이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돌로 자해하는 것 뿐이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께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정작 말을 한 것은 이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를 괴롭히지 마소서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더러운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무더기)라고 대답했다. 더러운 귀신은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다가 차라리 근처 산 곁에 있는 돼지 무리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갔고 귀신들린 돼지 떼 거의2천마리는 바다를 향하여 내리 달려 바다에서 몰사했다. // 귀신들린 자의 행색을 보면 귀신이란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신 자체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정도로 높은? 영적 수준을 갖추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이라고 해서 다 선한 (좋은, 하나님의 형상) 것은 아니다. 악한 영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예수님 앞에 달려나왔다. 군대 귀신은 여전히 무리지어 그 지역을 좌지우지 하고자 했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과 달리 한 군단이나 되는 귀신무리라고 해도 돼지무리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였다. 결국 그들의 바람과 달리 귀신들은 돼지들과 함께 바다에 몰사하고 만다.

14-20 (반응) 돼지를 치던 자들이 도망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하자 마을 사람들이 확인하러 보러왔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도) 여전히 두려워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과 돼지에게 일어난 일들을 마을 사람에게 알리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가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에게 알리라 하셨다. 귀신 들렸던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 지역에 전파했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다. // 예수님과 군대귀신의 만남을 지켜보던 사람은 어땠을까? 이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귀신 들렸던 사람 밖에는 안보였을 것이다. 영적인 존재인 귀신이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수많은 영적 존재들에 사로잡혀 지나가던 사람들을 해치고 자기 자신을 해하던 그 사람은 옷을 입고 정상적이 되었고,  대신 주변에서 치던 2천마리에 가까운 돼지들이  몰살된 현장을 지켜봐야 했다. 돼지치기들에게 이소식을 듣고 놀란 주변 마을 사람들이 뛰어 나와 이 사실을 확인했다. 거라사 사람들은 변화된 한 사람을 보았지만 이천마리에 가까운 몰살한 돼지 값만 생각했을 것이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아무리 해가 되었어도 돼지 이천마리 값보다 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귀신보다 더 강력한 맘몬신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배척한다. 귀신들렸던 자는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바라나 예수님은 주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신 것을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고 그는 순종했다. 그의 전파에 데가볼리 사람들까지도 놀랍게 여겼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귀신들린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된다. 다시한번 물리적 임마누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누리는 자가 곧 임마누엘을 누리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 갈릴리 반대편 어둠(묘지) 가운데 거하던 무더기 귀신들린 자는 갈릴리를 휩쓸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복음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가 축귀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느날 밤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일었다 잔잔해 졌을 때 무더기 귀신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알고는 무더기들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대로 개편해 맞서기로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대적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재빨리 예수님께 서 본토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화친을 맺자고 달려갔다. 제발 이동네만은 제가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다. 그래서 군대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군대 귀신은 하는 수 없이 돼지 떼에라도 들어가서 그 지방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허락하셨다. 군대 귀신은 어리석게도 돼지 떼는 자신의 영향아래 가둘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제 꾀에 빠져 돼지와 함께 바다에 빠져 몰살되고 만다. 그런데 그 지역 군대 귀신보다 더 쎈 우상이 있었다. (돼지가 몰살되자 군대귀신이 돈귀신이 되었을 수도 ㅎㅎ) 돈신이었다. 그 지방 여러 마을 사람들은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긴 예수님을 배척했다. 오늘날 같으면 집단 소송을 했을 것이나, 당시에는 집단 소송을 부추길 변호사들이 없었다. 물론 현대법으로 집단 소송을 했다고 해도 예수님께 승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은 손해라도 다시 그같은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 보낸다. 예수님은 아마 신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배를 다시 타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멀어져 가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한 그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셨을 것이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그 땅에도 좋은 땅이 있었다. 씨가 뿌려졌다.

^^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생각해도 저렇게 생각해도 재미있다.

마가복음 4:35-41

갈릴리 바닷가에서 하나님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은 배에서 가르치셨던 예수님을 배에 모신채 무리를 떠나 반대편으로 출발했고 다른 배들도 따라왔다. 갈리리 바다에 큰 광풍이 일어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피곤하셨던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라도 말했다. 예수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셨고 광풍은 그치고 바다는 다시 아주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서로서로 수근거렸다.

//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배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배들도 있었다. 큰 광풍이 일어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된 배가 예수님이 탄 배만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 배에 함께 있던 제자들 외에는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순종시키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로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의 해설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보긴 보아도 알지 못했고 듣긴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갈릴리 지역에 몰아친 예수의 하나님나라 전파와 갈릴리 바다에서의 광풍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좋은 땅이란 예수님과 한 배에 타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나라는 결과적으로 임마누엘이다.

>>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믿음이 인생길에서 만나게 될 큰 광풍을 없게 해 주지는 않는다. 결국 믿음도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믿음이다.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에 놀랐지만 주변의 다른 배에 있던 사람들은 광풍이 갑자기 잔잔해진 이유를 몰랐을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함께함, 곧 믿음은 같은 상황을 보는 우리의 태도를 바꿔준다.

>> 믿음이란 임마누엘이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함께 계셔도 해설(해결)해 주시기까지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다. 결국 임마누엘이란 물리적 함께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배에 타고 있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다면 소용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친절하게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깨닫게 하신다. 다시한번 제자들이 좋은 땅이요,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탔다는 것이 저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 예수라는 부적을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게 하소서.

마가복음 4:21-34

21-25 등불을 켜는 것은 비추기 위함이다. 빛은 숨기지 않으면 드러나고 감추지 않으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면서 무엇을 듣는지 조심하라고 하신다. 들은 것을 함부로 헤아리지 말라고 하신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긴다고 하신다. //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가 드러났다.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나라를 가르치셨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전통과 관습의 잣대로 함부로 하나님나라를 헤아리지 말라고 하신다.

26-29 하나님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 같다고 비유로 가르치신다. 사람은 (농부라도) 씨가 어떻게 싹이 나고 이삭이 달리고 충실한 곡식으로 영그는지 모르지만 심고 열매가 익으면 추수한다. // 복음의 씨는 뿌려져야 한다. 열매가 없음은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30-32 하나님나라를 또다른 비유로 말씀하신다. 하나님나라를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신다. 겨자씨는 작은 씨지만 심긴 후에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 공중의  새들이 겨자나무에 깃들일 만큼 자란다. // 여기서도 하나님나라는 심겨져야 하는 씨앗이다. 심겨져야 한다. 심으면 자라고 자라면 큰 그늘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쉼을 줄 수 있다.

33-34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셨다. 오직 제자들하고만 있을 때 모는 것을 해석해 주셨다. //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제자만 아니라 폭을 넓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따르는 모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 예수님이 등불을 켜셨고 하나님나라의 씨를 뿌리셨다. 이씨는 좋은 땅인 제자들을 통해 싹이 나서 이삭이 되고 열매를 맺어 추수를 하게 된다.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떨기인지 좋은 땅인지는 오직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게도 씨를 뿌리라고 하신다. 또 작아도 겨자씨를 심으라고 하신다. 우리들에게 사람들을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떨기인지 좋은 밭인지 함부로 헤아리지 (차별하지) 말라고 하신다. 모든 곳에 뿌리면 된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좋은 땅이 된 것도 하나님뜻이리라.

  • 몸살 3일째… 많이 나았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국제부녀절로 휴일이어서 여유있는 아침이다.

마가복음 4:1-20

1-2 // 예수님은 회당에서 산에서 집에서 그리고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셨다. 직접적인 교훈대신 비유로 가르치셨다.

3-9 //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셨다. 이 단락은 들으라로 시작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로 마친다. 듣기가 쉽지 않다.

10-12 // 예수의 열두 제자와 가까이서 따르는 함께한 사람들도 그 비유을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비유에 대한 설명에 앞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밝히신다. 가히 충격적이다. 봐도 알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다.

13-20 // 예수님은 함께한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씨를 뿌리는 자는 말씀 뿌리는 것이라고 하신다.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음~ ‘길가에 뿌려진 씨는 사탄이 즉시 와서 빼앗는다’가 아니고 ‘사탄이 즉시 와서 말씀을 빼앗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길 가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헬라 원문을 알지 못하니 ㅠㅠ) ‘돌밭에 뿌려지면’이 아니라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좋은 땅에 뿌려지면’ 대신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이라고 번역되었다. 다시말해 말씀이 뿌려진 결과를 보고 길 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떨기인지 좋은 땅인지 구분된다는 것이다.

>>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비유’의 가르침이 무엇일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되지 말고 좋은 밭이 되라는 것일까? 우리가 좋은 밭이 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 마음 밭을 잘 기경해야 한다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1라운드에서 무리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도를 (말씀을) 가르치시고 축귀와 치유로 전파하셨다.  그런데 2라운드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를 삼으셨다. 다시말해 좋은 밭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원해서 택한 제자가) 따로 있다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충격적이게도 씨가 뿌려지는 일반 무리들에게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적용하시고 함께한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좋은 땅은 예수님의 설명으로 비유를 깨닫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허락된 사람들은 적은 무리였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어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 중에 하나님나라를 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결국 좋은 밭은 적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시면서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사도로 세우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씨를 모든 땅에 뿌리겠지만 결국 열매맺는 땅이 좋은 땅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보냄을 받은 말씀을 뿌리는 제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열매 적음에 두려워하지도 좌절하지도 말라는 위로가 될 것이다.

>> 좋은 땅에  뿌려진 말씀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많은 열매를 맺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바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요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어떤 땅인지 상관없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이 그 본보기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모든 사람이 좋은 땅이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 좋은 땅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은 (좋은 땅이라고 인정받은) 성도가 할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다른 사람 마음 밭을 아무리 기경해도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가 우리 뜻대로 좋은 밭이 되지 않는다. 다시말해 말로 아무리 잘 가르쳐도 소용없다. 가르치는 자가 행색만이 아니라 뼛속까지 예수님의 모조품이 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그러면 그곳에 열매맺는다. 그곳이 좋은 땅이 된다. 전설에 따르면 열두제자 대부분이 순교했다고 한다.

>> 나도 처음부터 좋은 땅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요 나의 왕으로 고백하며 살게 된 것이 아니다. 길가였을 수도 있고 돌밭이나 가시떨기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을 희생한 믿음의 선진(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한 알의 밀알이 내게도 떨어져 죽었기에, 지금 내가 그분들의 열매의 하나로 하나님나라에서 (좋은 땅으로) 살아갈 뿐이다. 결국 나의 삶도 정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을 기경하려고 할것이 아니라 우선 좋은 땅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라고 하신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아내라고 하신다. 말이야 쉽지. 굳이 기경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 마음 밭이나 어차피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내 마음 밭을 기경해주셔서 순종하는 성도로 살아가길 간구한다.

* 뭔가 놓친 자의적 적용일까 두렵다. 어제 저녁부터 오한에 반 죽음이다. 빨리 나아야 할낀데…

작년 마태복음 씨뿌리는 자 비유 묵상을 찾아서 읽어봤다.

마 13:1-17

마 13:18-30

마가복음 3:20-35

20 예수님에게는 집에서도 쉴 수 없으셨고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다. // 그렇다고 일중독이 아니셨다. 사람이 찾아오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사역하셨지만 남은 기간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때를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21-30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가 미쳤다며 붙들어 가려고 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이때다 싶어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스스로를 거슬러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귀신보다 강한 자이심을 천명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 예수의 친척들이 서기관들의 사주를 받고 예수가 미쳤다고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서기관들은 예수를 귀신들린 미치광이로 몰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보다 강한 성령의 힘으로 축귀하심을 선언하신다. 성령을 더러운 귀신 취급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죄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영원한 죄라고 강하게 질책하신다. 다시말하면 성령거하실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저주 받은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31-35 예수의 친척들에 이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친척들 처럼 예수님을 끌어 내려고하지 않고 밖에서 조용히 예수를 불렀다. 예수를 둘러 앉아 있는 무리가 예수님께 밖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왔다고 전달했다. 마가는 굳이 동생들을 남동생과 누이라고 구분해서 기록했다. 예수님은 둘러 앉은 무리를 향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도 친척들 같이 예수가 미쳤다며 집으로 데려가려고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특별히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수태고지 받았고 성전에서 찾은 어린 예수의 말도 마음에 품고 살아왔을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왜 왔는지 답을 하는 대신, 예수님의 가족은, 곧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집중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부터 난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님 주위에 둘러 앉아 예수의 가르침을 받는 무리들을 보며 내 어머니요 내 동생들이라고 부르셨다.

>> 예수님은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무리를 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을 제외한 무리가 세명이라고 극단적으로 줄여서 생각하면 남자 하나에 여자가 둘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무리중에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같은, 누님 같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라면 어머니 같은, 누님 같은 분들에게 리더쉽을 못맡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리더쉽이 섬김의 리더쉽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낮은 자, 작은 자가 되는 리더쉽이다. ‘종’에 ‘님’자를 붙여 ‘종님’이 되는 리더쉽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니 집에서도 쉬지 못하고 밥먹을 겨를도 없었다는 예수님에 대한 수식어를 우리 어머니들에게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세대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 목사보다는 목사 사모들에게 딱 어울리는 묘사라고 생각된다. 이들이야 말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는 세상 리더쉽 특강이 아니라, 섬김의 리더쉽 특강이 아니라, 청지기 리더쉽이 아니라, 바로 종쉽 (servant-ship) 특강이 아닐까 정리해 본다. 리더쉽이라는 표현을 떼어버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미 한분 리더, 주인이요 왕이신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잘 순종하느냐가 중요하다.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꼰대 서기관들일 것이다. 변방 갈릴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그래도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있어 예수님을 따라다녀 보았지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혀 곧바로 듣보잡 갈릴리 출신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덤볐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면 잠잠히 배워야 하는데 저들의 마음은 이미 완악해져서 성령이 거할 틈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원어를 잘 알고 좋은 주석을 옆에 두었다 하여도 전통과 관습에 따른 꼰대적 이해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오늘도 너희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서 크게 오해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실 것이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령이 피보다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