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19

1-6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보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주목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일어서게 하시고 회중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어느것이 옳은지 물으셨다. 당연한 질문에도 회중은 잠잠했다. 예수님은 잠잠한  회중의 마음이 완악함을 아시고 탄식하셨다. 그리고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셨고 그의 손은 회복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

//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답을 알고도 잠잠했다. 진리로 전통과 관습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으로 진리를 평가했던 것이다. 주객전도일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은 완악했다. 무너뜨려야 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이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한쪽 손 마른 사람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이날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혹시나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바리새인들은 드디어 완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심지어 평소같았으면 상종하지 않았을 헤롯당과도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일 의논을 했다.

7-12 예수님은 마을에서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다. 큰 무리가 따랐다. 심지어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강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려는 무리를 피해 작은 배에 올라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짖자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 예수님의 소문은 갈릴리에서 저 멀리 유대 남쪽 이두매까지 퍼졌다. 또 두로와 시돈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사람들도 이미 하나님나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은 주도권을 예수님께 온전히 드리지 않았다.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만져도 같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에게서 한걸음 물러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든 귀신들로부터든 큰 자로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왜? 귀신들의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예수님은 돌들보다 못한 귀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셨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부터 하나님으로 인정 받기를 원하신 듯하다. 한편으로는 드러나셔야 (영광받아야) 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시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13-19 예수님은 산에 오르사 무리들 중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따로 부르셨다. 열둘을 세워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게 하시며  축귀의 권능도 가지게 하셨다. 마가는 열둘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마지막에 포함시킨다.

//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열둘을 세우셨다. 열둘을 세우신 첫번째 이유가 함께 하심이다. 두번째는 제자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는 기록에서 ‘사도’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도로 세우셨다. 시므온에게 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는데 단순한 별명이라기 보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이들이 해야할 역할을 부여하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룟 유다가 회계였다면 베드로는서기, 야고보와 요한은 총무와 홍보팀장 쯤 되지 않았을까? 별생각을 다한다. 그렇다고 누가 크고 누가 작고 하는 그런 수직적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만 오른 8명도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 바리새인들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인 우파여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유다는 좌파여서 결국 예수님을 버렸을까? 우파든 좌파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 모든 이론들이 하나님나라 문 앞에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게 한다. 전도자는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피한다고 가르쳤다.

>>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고백한다. 바울의 고백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분이셨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버린자로 기록된다. 팔았다라고 번역되지만 제 값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버린’이 더 맞는 번역인것 같다. 가룟 유다는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 사야할 보화가 뭍힌 밭의 보화요, 값비싼 진주이신 예수를 버렸다.

>>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알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사도적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온전한 임마누엘을 누리고 사명자로 살도록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2:13-28

13-17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도 큰 무리를  가르치셨다. 마가는 장면을 바꿔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에게 자신을 따르라 하시고 레위 집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기록한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곧 예수를 따르는 그러한 부류의 (세리와 죄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인 서기관들이 보았다. 이들은 예수님께는 감히 묻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물으며 정죄했다. 촉이 좋으신 예수님이 들으시고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쓸 데 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 가르침을 받는 무리의 수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 외에 제자를 따로 세우신다. 예수님과 가까운 (함께 먹고 마시는) 무리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 곧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따라다니는 무리들 중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큰 걸림돌이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주변 사람들때문에 결국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불쌍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의인이니 의사가 필요업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도 병든 자임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18-20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답하셨다.

//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이유를 스승 세례 요한을 빼앗겼기 (요한이 옥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나라를 로마에 빼앗긴 것으로 금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선생과 (하나님나라의) 주되신 (성육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을 암시한다

21-22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라. //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통과 관습의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비유한다.

23-28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내다보니 이삭을 잘라야 했다. 시장해서 먹으려고 잘랐다고도 본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고발했다.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중에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아비아달 대제사장에게 받아 먹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느냐고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반문하신 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

// 유대전통에 따르면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안식일에 씨뿌리고 밭갈고 추수하고 거두고 타작하는 일을 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추수하기를 범한 것이다. 또 랍비의 명령들에 보면 주중에 하던 활동도 금하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들도 이미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안식일 율법을 관대하게 적용하고 제자들에게는 융통성 없이 적용한 것이다. 율법에도 예외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전통과 관습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은 주일예배, 주일성수도 마찬가지다. 주일의 정신보다 교회전통과 관습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 의인이냐 죄인이냐, 금식, 안식일에 대한 모든 판단의 근거를 전통과 관습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전통과 관습에 따른 자칭 의인을 부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자 낮은자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려고 오셨다.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아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자랑질을 했다. 그에 반하여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 한국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마음 아프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시는데 용서와 사랑의 잣대는 간곳없고 다들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은양 떠든다. 내가 보기에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들과 별 다를바가 없다. 바리새인 마냥 말씀을 가진 자들이 낮아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한다. 어느새 전통과 관습이 말씀보다 앞선다. 슬프다.

>> 새 포도주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면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함께 먹고 마시는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처럼  낮은 자, 작은 자 편에 서고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라고 하신다. 쉽지 않다. 주여 도우소서.

마가복음 2:1-12

1-2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적어도 칠일 동안은 나병환자를 만져 부정하다 일컬음을 받은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성밖 한적한 곳에서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축귀하시고 치유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수일 후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아마도 시몬의 장모집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도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에 우선순위가 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축귀와 치유보다 하나님나라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이 영순위였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 축귀와 치유보다 중요하다.

3-12 네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무리가 많아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으라 하셨다. 그자리에 있던 어떤 서기관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하나님 한분만이 하실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생각을 아셨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선언과 병고침의 선언 중 어느 것이 쉽겠냐고 하시면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줄 알게 하시려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가 일어나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아갔다. 모인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때껏 보지 못한 일이었다.

//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길 원해도 믿음의 친구들이 없었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내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 동거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을 하자, 자신들이 서기관이 되면서 배웠고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알고 있는 죄사함의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이 서로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도 치유의 권세도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러자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이 없다. 이렇듯 내가 영광을 받아야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말은 틀린말이다. 내가 큰자가 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가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오히려 나는 쇠하여야 한다. 나는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굳이 작은 자라고 부르신 이유가 여기있을 것이다.

>>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죄사함인가? 치유인가? 삼척동자도 죄사함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요즘과 다르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질병과 죄를 연결시켜 생각했다. 요한복음 9장에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장님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장님이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하여간 나는 중풍병자에게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치유보다 죄사함이 더 절실했다고 생각한다. 치유받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간 것은 죄사함의 증거에 불과했다. 그러나 죄사함의 선언은 힘들다. 어떤 서기관들이 하나님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한 이유다. 결국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선언되었듯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사건이다. 중풍병자는 먼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 곧 그동안의 맘고생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았다. 작은 자와 함께 한 네 친구도 위로 받았을 것이다. 죄사함이야 말로 성도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첫걸음이다. 치유는 덤이다.

>> 선교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말씀을) 가르치면서 죄사함의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축귀나 치유의 결과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어우러지면 좋겠지만…

마가복음 1:35-45

35-39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까운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전도하자고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축귀하시고 치유하셨다.

// 예수님은 기도로 성부하나님과 대화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들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것이 그날 새벽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자들, 특별히 시몬은 장모의 집을 치유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을지 모르겠다. 시몬축귀치유센터장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뜻대로 사람들이 찾아 오는 센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찾아가는 전도를 하셨다.

40-45 한 나병환자 예수께와서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곧 나병이 그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다. 예수님은 깨끗해진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깨끗해졌음을 모세가 명한 율법에 따라 입증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일을 떠벌이는 바람에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가실 수 없었다. 대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면서 사방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축귀하시고 치유하셨다.

// 여자의 손을 잡아 치유하셨던 예수님은 이번에는 나병환자를 만져 치유하셨다. 모두 유대관습을 깨는 행위였다. 특별히 나병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지기 때문에 금기시 되는 행동이었다. 나병환자를 만졌다는 소문에 예수님은 한동안 마을에 들어가셔서 전도하실 수 없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겠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권위로 성읍에 들어가시지 않으셨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육신의 나병은 치유받았어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에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했다. 내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자동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의 진단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치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관계회복이다. 좋은게 좋다고 공적인 절차가 있는데 권위로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공동체 일원이 되도록 하셨고, 대신 성밖 한적한 곳에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전도하시는 기회로 삼으셨다.

>> 한적한 곳.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성부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한적한 곳을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삼으셨다. 나의 한적한 곳은 어디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21-34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다. 뭇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다르게 권위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정확이 알았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셨다. 예수님의 축귀에도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교훈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예수님은 그새 시몬(베드로)도 제자로 삼으셨다. 어느날 예수님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다. 저물어 해질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고치심으로 소개하신다. 마가는 주저함 없이 이 세 사역이 기존과 달랐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마가는 예수님 사역의 특징을 권위라고 한다. 당시에 무슨 라이센스가 있었겠냐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심과 축귀와 치유가 야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권위있는 가르치심과 권위있는 축귀에 사람들은 놀라고 놀랐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전통과 관습이 더이상 권위의 근거가 되지 않는 나라다. 율법교육을 따로 받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남녀의 구별의 확실했던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손을 잡고 치유하셨다. 갈릴리가 단순히 유대 변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또 새로운 헬라문화의 통로였기 때문에 전통과 관습을 뛰어 넘으셨던 것이 아니라 마가의 첫 일성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그것이 전통과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나라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불순종의 마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어도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아는 것과 순종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