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4:1-16

1 주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했다. // 에스겔서를 읽을 때마다 부러웠다. 항상 말씀해 주시니. 이 아침에는 에스겔이 아마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도 언제든지 말씀을 펼수 있지 않은가?

2-7 주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고 하신다.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라고 하신다. 목자라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병든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싸매주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 하는데, 오히려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고 그 털을 입고 양 떼는 먹이지 않고 포악으로 양 떼를 다스린다고 책망하신다. 이렇게 목자 잃은 양 떼들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의 양 떼가 주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떼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는데 왜 찾고 찾지 않느냐고 하신다. 이런 목자들에게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8-10 주하나님께서는 양 떼 이스라엘이 노략당하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의 양 떼를 맡은 목자들이 양들을 찾지 않고 (돌보지 않고) 자기만 먹고 양 떼를 먹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런 목자들에게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목자를 대신하여 주하나님께서 직접 양 떼를 찾으시겠다고 하신다. 양 떼를 돌보지 못하고 오히려 양을 잡아 먹는 목자들 손에서 양을 찾으시고 목자들이 양을 잡아 먹지 못하도록 건져내시겠다고 하신다. 다시는 목자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돌보시겠다고 하신다.

11-14 주하나님께서 주하나님의 양을 찾고 찾으시겠다고 하신다. 선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음 같이 주하나님께 주하나님의 양을 찾아 건져내시겠다고 하신다. 만민 가운데 흩어진 양을 모아 다시 이스라엘 산 위와 시냇가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실 것이라고 하신다. 좋은 꼴을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서 돌보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이시겠다고 하신다.)

15-16 주하나님께서 삯꾼 목자대신 선한 목자가 되어 (유리하는) 양 떼들을 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고, 쫓기는 양을 돌아오게 하시고, 상한 양을 싸매 주시고, 병든 양을 강하게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살진 삯꾼 목자와 강한 삯꾼 목자들은 주하나님께서 없애실 것이라고 하신다. 정의대로 양들을 먹이실 것이라고 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양 떼가 목자없이 유리하는 이유를 외부의 공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들의 문제가 아니라 목자들의 문제라고 하신다. 목자가 있음에도 목자들이 목자의 사명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포식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목자들이 하나님의 양 떼를 자신의 소유인 양 횡포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들도 양들 중 하나라는 것을 잊어버린 결과다. 목자로 세움을 받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잊어버리고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결과다. 이런 삯군 목자들은 하나님나라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 하나님께서는 목자로 삼았던 이스라엘 지도자들 대신, 하나님께서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돌봐주시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말씀하신다. 성자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선한 목자로 이땅에 오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 오신 이유를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는 도둑같은 삯꾼 목자와 달리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라고 말씀하셨다.

>> 성도의 삶은 좋은 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좋은 우리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공동체, 교회)에서 서로의 돌봄을 받는 것이다. 당연히 믿음의 공동체의 지도자들도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먹고 주님의 공동체에서 서로 돌봄을 받는 지체 중 한 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말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아기 양에게 목자의 음성을 따라 순종하는 본을 보이는 어미 양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는 우리 주님이시다. 살찐 지도자, 강한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없애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도 정의로운 (공평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에스겔 33:21-33

에스겔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해 온 사람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주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도착하기 전날에 입을 열어 이 모든 일을 말하게 하셨다. 따라서 사람들이 에스겔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에스겔은 담대히 입을 열어 ‘경고 전달자’로서의 파수꾼 역할을 감당했다.

주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폐허더미에 앉아서도 주하나님께서 한명 아브라함이 이 땅을 차지하도록 하셨는데 하물며 아직 많은 수가 남아 있는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항변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너희는 피채 고기를 먹었다 너희 눈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바라보았다.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렸다. 이웃의 아내를 더럽혔다.’ 라고 말씀하시며 이런 죄악가운데 이땅을 차지할 수 있느냐라고 주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악가운데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주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폐허에 남아 있는 사람도 칼에 맞을 것이라고, 벌판에 나가 들짐승에게 잡혀 먹힐 것이라고, 산과 동굴에 숨어도 염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모든 산이 메마르고 사람이 살 지 못하는 황무지와 폐허로 만드시겠다고 하신다. 그때야 사람들이 주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모르면 영생, 곧 하나님나라를 누릴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말씀을 듣기위해 에스겔에게 올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완악해 진) 사람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에스겔을 통한 주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복종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를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에스겔의 경고를 열린음악회를 방청하듯 즐기기는 하겠지만 그대로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에스겔의 말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서야 에스겔이 참 예언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 예루살렘에서 온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에스겔의 예언이, 아니 주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한다. 이렇게 에스겔은 참 예언자가 된다.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파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신다고 마가복음 에필로그는 마무리된다.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도들 안에 거하신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함으로, 곧 예수의 계명을 지킴으로 예수 안에 거할 수 있다.

>> 사람들이 에스겔이 참 선지자라고 하여 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에스겔 앞에 나오겠지만, 주하나님은 그들이 주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 날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화답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지만 그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산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이땅을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따지는 무리와 예수 믿으니 구원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외치는 것이 다른 것일까? 거짓과 포악과 간음이 가득하면서도 난 예수 믿는 사람이야 라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친 거짓 선지자들만 좇아 다녔던 이스라엘 배성들처럼 고난 없는 반쪽 복음만 외치는 설교자들에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라고 박수치며 노래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듣기만 해서는 안된다.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다. 예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보혜사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능력으로 순종할 수 있다.

>> 다시 오실 예수께서는 오직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신다. 임마누엘을 맛보는 유일한 길이다. 에스겔에게 끊임없이 주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듯, 그리고 에스겔이 말씀의 성취를 맛보듯,  이렇게 에스겔이 참 선지자로 인정받듯, 우리도 말씀 앞에 꾸준히 나가 순종으로 말씀이 성취됨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성도로 인정받게 하소서.

에스겔 33:1-20

주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파수꾼은 경고하라는 주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악인에게 경고를 해야 (영원한) 생명을 보전한다. 경고를 듣는 악인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야 (영원한) 생명을 보전한다. 작년 7월 에스겔 3장의 반복이다. 이 말씀은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으니 3장과 다름은, 주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삼으신 것은 파수꾼의 경성함, 곧 깨어있도록 부르셨다기 보다는 경고를 전달해야 하는 파수꾼, 곧 메세지를 반드시 전해야할 사명을 가진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주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으니 어찌 능히 살겠느냐고 에스겔에게 항변할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예루살렘 성이 이미 무너졌듯이, 자신들은 포로로 잡혀왔으니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겠느냐고 따질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주하님께서는 늦지 않았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악인들이 악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이 돌이키고 돌이켜 악한 길에서 떠나 죽지말라고 (복음을) 들려주신다.

주하나님의 복음은 의인이 범죄하면 죽고 악인이라고 그 악에서 떠나면 산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하나님께서 너는 살리라 라고 말씀하신 의인이라고 자신의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주하나님께서 그 이전의 모든 의로운 행위를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시고 지은 죄악가운데서 죽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반대로 너는 죽으리라 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악인이라고 자기의 죄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루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며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살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하나님의 복음이 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는 살리라’라는 선고를 이미 받았다고 생각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길이 바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 바르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주의 길은 분명하다. 만일 의인이라도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는 정의와 공의 가운데서 살것이라고 하신다.

공평하신 주하나님의 길은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 이다. 시편 62편 기자는1절에서 “내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기다림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그 노래의 마지막을 11,12절 “하나님께서 한가지를 말씀하셨을 때에, 나는 두가지를 배웠다. ‘권세는 하나님의 것이요, ‘한결같은 사랑도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 주님께서는 각 사랑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라고 마무리한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마태는 16장 26절에서예수님께서 제자의 길이 가르친 후 마지막 때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사람에,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성자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변함이 없다. 이신칭의의 대명사 바울도 갈라디아서를 정리하면서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정리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변함 없으신 분이시라고 고백한다면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주의 길이 바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법이 굽지 않고 집행된다는 것이 복음이다. 의인이라도 죄악을 범하면 그 죄 가운에서 죽고, 악인이라도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정의와 공의 가운데서 (영원히) 산다. 확실하지 않은가? 정의와 공의 가운데서 살라고 하신다.

>> 종말을 사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파수꾼으로 부르셨다면, 그것은 깨어있어 징조를 잘 살펴 때와 시기에 대한 예언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정의와 공의 가운데 살지 않으면 죽고 정의와 공의 가운데 살면 영원히 산다 라는 경고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파수꾼이 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가? 하나님의 공평하시다.

사족: 마가복음 에필로그는 불신과 불신을 거듭하는 제자들이 (돌이켜 40일 동안 하나님나라에 대해 다시 배우고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루 나가 복음을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끝을 맺는다. 성령의 능력은 말씀을 순종할 때 표징으로 드러난다.

마가복음 16:1-20

Happy Easter!

1-8 // 안식일이 지났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두었다. 이 안식일이 유월첫 첫날 지키는 특별 안식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야 2절 안식 후 (이 안식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정기 안식일일 것이다)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여인들이 그 무덤으로 갔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1절의 안식일이 정기 안식일이라면 안식일이 지난 후 여자들이 예수께 바를 향품을 산 것이 안식일 저녁이 지난 후여야  하는데 그때 향품을 사두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하여간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 여자들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누가 굴려줄까 의논하며 예수의 시체를 둔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 큰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다. 무덤에 들어가니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무덤 우편에 앉아있었다. 흰 옷을 입을 청년이 놀라는 여자들에게 “놀라지 말라 너희가 찾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예수의 시체를 두었던 빈 곳을 보여주었다. 흰 옷을 입은 청년은 여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죽기 전에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만나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여자들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 15장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비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세마포를 사서 예수의 시체를 그 세마포에 싸서 돌무덤에 모셨다.  세마포를 사는 매매행위를 했다는 것은 아직 안식일이 시작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안식일이 과연 정기 안식일이냐 아니면 유월절과 무교절 첫날에 지키는 특별 안식일이냐가 문제다. 마가복음의 이전 문맥으로는 14장 12절 무교절 첫날에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무교절 첫날을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했으니 해가 지기 전이라면 아직 첫날이 시작 안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그날 밤에 잡히셨다면 유월절 준비일에 잡히셨고 유월절/무교절 첫날에 처형되셨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15장에서는 안식일 준비일에 처형되신 것으로 기록한다. ㅠㅠ 16장 1,2절에 연속된 두번의 안식일이 나온다. 두 안식일이 같은 안식일이라면 사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첫번째 안식일을 유월절 안식일이요 두번째 안식일을 정기 안식일로 읽기도 한다. 그래서 수난일을 수요일로 (목요일일 수도 있지만, 밤낮 3일 후 부활을 맞추기 위해)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안식후 첫날’은 오직 예수의 부활과 관련한 구절에만 사용된 표현이라고 한다. 하여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15장의 안식일을 정기 안식일로  해석해서 금요일을 수난일로 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여정에 대하여 교회는 통일된 해석을 못한다. 전통과 관습이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물론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이 구절에 충실하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날짜를 따지기 보다 그 의미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에 더 충실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기피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 여자들은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 여자들은 빈 무덤을 봤을뿐이다. 이들에게는 예수 부활의 감격이 아니라 예수 부재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8절은 실질적인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일 수 있다. 마가는 왜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끝을 맺을까?  부활절 아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끝을 맺는다는 것이 영 어색하다. 승리의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만나주시기까지. 그러나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귀에 울린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성도들은 정녕 복있는 사람들이다. (마가는 예수부활의 빵빠레를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울려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9-20 // 9절부터는 마지막 절 까지는 [  ]로 묶여있다. 예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 마리아가 슬픔에 잠겨 있던 예수와 함게 하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렸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도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는 시골로 (아마도 엠마오로) 가는 두사람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두 사람은 예수의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다. 남은 제자들 역시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예수를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불신과 불신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믿는 자들에게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하고 새 방언을 말하며 뱀과 독의 해를 받지 않으며 오히려 치유의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이 나가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셔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여러가지 표적들이 나타나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 때 따라는 여러가지 표징을 통하여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 마가복음의 에필로그에서도 예수의 부활을 듣고도 불신 불신 불신했던 제자들을 만난다. 부활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지만 결국 제자들에게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까지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습을 통하여 믿음없음을 믿음으로 , 완악한 마음을 (마음의, 성령) 세례로 씻어주셨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에게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임마누엘의 표징으로 주신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믿음 없고 마음이 완악한) 사람과는 함께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되었고 순종하는 제자들을 통해 진행중이다.

++++ 페북에는 아래 글도 포함

마가복음 읽기를 마쳤다. 깊은 묵상보다 그냥 읽으면서 내가 이해한 대로 본문을 다시 적어보고, 본문을 다시 적으면서 느낀점을 더하고 의문점을 생각해보았다. 개인적인 적용은 가급적 쓰지 않았다. 주석이 던지는 질문보다는 개역성경을 읽어내려갔고 이해가 안되면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다른 한국어 번역과 영어성경도 참조했다. 단어검색은 폰에 있는 성경앱을 사용했다. 성경본문을 베끼다시피한 나의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신 정병오 최태룡 우홍기 온상원 이상권 김동주 전현철 석귀희 김기현 조경애 이기영 윤성남 김기형 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사실 지적(질)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분은 없으셨다.  긴글을 눈으로 보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사실 나 스스로도 긴글은 스압으로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친구들이 있는 개인 페북에는 묵상글을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마가복음 묻고 답하기는 긴 글을 서로 올리니 잘됐다싶어 그냥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많지 않은 본문일 경우에는 다른 분들의 글을 매일 모두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스타일이 전혀 다른 정병오 님의 묵상을 나의 단면적인 이해를 보충하기 위해 꾸준히 읽었고, 이해안되는 부분을 참고하기 위해 먼저 나의 묵상을 마친후에 다른 분들의 묵상을 읽으며 부족한 부분을 해소했다. 김동주님의 주석형 해석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김기현님의 개인성찰적 동영상도 감사했다. 온상원님의 마가복음관련 책 부분요약글들도 다음날 성경읽기의 폭을 넓혀주었다. 전현철 님이 올려주신 자료도… 참 귀한 공동체라고 생각된다. 전통과 관습만 남아가는 시대에 여러분 모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기쁨이 매일매일 새롭게 솟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마가복음 15:33-47

33-38  // 제 육시가 되매 (정오)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있는 시간이다. 이 어둠이 제 구시 (오후 세시) 곧 태양의 열기가 가장 뜨거워야 할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이 어둠을 깨고) 제 구시에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힘을 내어 크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셨건만 곁에 있는 사람들 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한 이도 있고 예수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던 자도 있었다. 이들은 과연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주는 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신 후 숨지셨다. 예수께서 숨지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당시 성전에 있던 제사장들이 추후에 보고했을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아버지의 뜻이었을 때 심히 놀라고 슬퍼하며 고뇌하시며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때와 이 잔이 지나가기를 바라셨지만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지막 순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실 때 처럼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준비하시고 자신은 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일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버림받기까지 순종하셨다.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과 다름 없었던 이삭을 살리시듯 아들 예수를 살리시지 않으셨다. 죽게 하셨다.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버리심을 받으시면까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다. 죽음 너머의 부활을 소망하게 하신다.

39-47  // 예수의 십자가 형을 주도 했을 백부장이 (가까이서) 예수께서 숨지심을 보고 예수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고백했다. 여자들, 곧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여자들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예수께서는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에 숨지셨다. 날이 저물고 있어지만 아직 안식일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셉은 존경받은 공회원이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된다. 빌라도는 요셉의 요구에 십자가 형으로 예수가 벌써 죽었을까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다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후 요셉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주었다. 요셉은 세마포를 사서 예수의 시체를 그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을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다. (이쯤이면 완전히 저녁이 되어 안식일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둔 곳을 보았다.

>> 백부장은 무슨 근거로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 오늘 가장 많이 생각한 질문이다. 마가는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기까지 (새벽 6시에서 오후 세시까지) 백부장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지켜보았을 것이라는 암시외에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소문에 들은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낮은 자리, 곧 죽음의 자리까지 순종하시는 것에서 세상권세와 같지 않은 하늘의 권세를 보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요셉 처럼 존경 받은 공회원도 아니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도 아닌 이름 없는 백부장의 증언으로도 예수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 증인의 자격과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증언의 내용이 무엇이지 중요하다.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이다. 내가 이땅에서 높아져야 질 좋은 증언을 할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의 시체를 그 세마포에 싸서 돌무덤에 모셨다.  세마포를 사는 매매행위를 했다는 것은 아직 안식일이 시작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안식일 준비일이 유월절과 무교절 첫날에 지키는 아무일도 하지 말고 먹을 것만 챙기라고 하신 특별 안식일의 준비일인지, 매주 돌아오는 정기 안식일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준비일 곧 특별 안식일 (유월절 첫날) 전날이라면, 무교절 첫날(14:12) 구절을 다시 설명해야 한다. 하여간 교회는 이 안식일을 정기 안식일로 지켜 금요일을 수난일로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에 대하여 왜 교회는 통일된 해석을 못하는 것일까? 물론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이 구절에 충실하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 백부장이 가까이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봤다면 여자들은 멀리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이들은 믿음으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백부장은 물리적으로 예수의 죽음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여자들은 알 수 없었다. 며칠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처럼 이 여자들은 제자들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지위와 성별의 차이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이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눈은 끝까지 예수를 떠나지 않는다. 예수 둔 곳을 본다. 여인들이 아직 보지 못한 예수의 부활을 미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