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

복이 있는 사람. 시편에서 시인들이 노래하는 복은 일상의 복이다. 일상에 더해지는 복이라기 보다는 삶의 희노애락에서 누리는 복이다. (그래서 시편 94편의 시인은 주로부터 징벌을 받는 것도 복이라고 노래하고 128편의 시인은 정당한 수고로 먹는 사람이 복되고 형통하다고 노래한다.) 이렇듯 오늘 시인이 ‘복되도다’라고 노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주하나님을 경외하든, 주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든, 주하나님의 용서함을 받든, 주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든. 주하나님을 알고, 주하나님께 아신 바 된 사람이 복되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면 주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하나님께서 정결하지 않은 곳에 오시지도 않겠지만 내 마음에 주심을 모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귀에 듣기 좋은 칭찬소리라서가 아니다.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교훈으로 심지어 명령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이 책망을 교훈을 명령을 말씀하시는 참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묵상한다.

하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을 말씀의 시냇가에 심으신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내리게 하신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서  계절에 따라 합당한 열매을 맺게 하신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게 하신다. 복 있는 사람의 형통함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이다. 처음엔 한그루 나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에스겔의 환상과 같이 한그루가 아니라 나무들로 번성할 것이다. (에스겔은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악인이란  결국 복이 없는 사람이다. 복이 없는 사람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한다. 광풍이 아니라 작은 바람에도 날려 흩어지고 만다. 특별히 더 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는 자다. 아니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 곧  바람피는 자들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곧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도 묘사한다. 이런 자들은 주께 무엇을 받을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시인의 노래는 분명하다. 의인들의 길은 주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안다고 하시나 악인들은 모른다고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가 양들을 알고 양도 선한 목자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 아신 바 됨이 (인정받음이) 복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에 함께 (속) 하는 것이 복이다. 임마누엘 외에 다른 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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