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

시인은 전심으로 주하나님께 감사한다.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간증한다.

시인의 간증은 지존하신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한 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의 원수들이 주로 말미암아 도망치다가 넘어져 망했다고 한다. 주께서 시인의 변호사가 되어주셨고 재판관이 되어주셔서 재판이 의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주께서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고 악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다고 한다. 시인은 주께서 대적들이 멸망시키시고 원수들의 성읍을 무너뜨린 일들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조차 없이 많다고 감사한다. 시인은 영존하신 주하나님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고 정의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압제 당하는 자들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피난처요 요새라고 노래한다. 주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주를 의지한다. 주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께 모인 자들에게 시인은 주를 찬양하며, 주의 행사를 백성중에 선포하라고 명한다. 주께서는 피를 흘리는, 곧 포악자에게 핍박당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의 탄원을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신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한다. 시인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켜 달라고 탄식한다. 주께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받는 고통을 알아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볼보셔야 주께 찬송할 수 있고, 간증할 수 있고 주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이방나라들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악인들은 심판하시는 주하나님을 보며,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악한 행실에 자신을 돌이키지 않았다. 악인들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간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잊어버린) 모든 나라들이 같은 길을 간다. 그러나 주하나님은 궁핍한 자를 기억하시고 가난한 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주하나님은 사람의 계획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신다. 시인은 이방나라들이 주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인생에 (창조주가 아니라 사람의 꾀를 내를 망할 존재라는 것에) 불과하다는것을 알게 해 달라고 탄원한다.

>>  오늘 시는 다윗이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한다.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노래 내용은 ‘레퀴엠’ 곧 죽은 사람을 위한 위령곡이 아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노래하는 것일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벌을 받는다. 벌로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다윗의 금식기도에도 이레만에 죽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 모반을 (압살롬의 모반도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야를 살인한 죗값이라고 할 수 있다)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도 ‘차라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하고 울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의 노래는 죽은 아들들을 위한 장송곡이 아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주하나님을 만난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가정에서도 죄를 범하면 벌을 받아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죄를 범하면 벌을 받아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 시인은 벌을 받으면서 하나님부재의 고통을 느꼈다. 그래서 인정머리 없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시인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고통을 애가로 지어 노래하지 않고, 공의와 정의의 주하나님을 찾았다.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고통속에서도, 주님을 찾는 자를 영원히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간다. 사탄은 끊임없이 공의와 정의를 운운하며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이라는 것만 강조할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걷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를 찾는 자, 주께 돌이키는 자를 죽음에 (영벌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시인이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한 자,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와 찬양으로 노래하는 이유다.)

사족: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있다면 아버지의 부재가 아닐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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