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1

오늘 시는 시편 20편 9절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를 어어받는다. 20편 9절의 간구에 대한 응답에 감사기도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시인은  ‘우리’ 왕이 주께서 주신 힘을 기뻐하고 주께서 구원해 주심을 크게 즐거워한다고 노래한다. 주께서 우리 왕의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셨다고 찬양한다. 주께서 왕을 무릎꿇리시고 관을 씌워주셨다고 (왕으로 세우주셨다고) 노래한다. 왕이 주께 구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장수로 삼아주신다. 그뿐 아니라 왕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존귀와 위험있게 하신다. 영원토록 왕으로 세움을 입는 복을 받게하시고 주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 왕은 오직 주하나님만 의지한다. 왕은 지존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왕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안다.

왕은 주님의 원수를,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어 주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긴다. 왕은 원수들의 후손도 땅에서 멸절시킨다. 원수들이 왕을 해하려고 계책을 세우나 이루지 못한다. 왕이 원수들로 도망가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길 것이다. 왕은 주님의 대적들을 무찌름으로 주의 능력이 높음을 찬양한다. 시인은 다시 우리가 되어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한다.

>> 어제부터 ‘우리’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힌다. 성도라면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된 지체인 다른 성도 한명 한명을 왕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베드로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라고 편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어느지체도 다른 지체보다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너’가 아닌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한다. 여기에 묘미가 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도 자신의 (개인의) 하나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공동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골리앗을 무찌른 승리의 기쁨도 다윗 자신만의 승리가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승리였다. 이렇듯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다.

>>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근심걱정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정신이 필요하다. 성도라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기도보다, 왕을 위한 (다른 성도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제목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