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멀리계심에 (벌을 받는) 고통으로 주하님을 찾는다. 악한자는 얼씨구나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시인을 압박한다. 악한자는 이때다 싶어 벌주시는 하나님만 강조한다. 악인은 시인에게 하나님께 돌이켜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시인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인의 생각이고, 악인의 이런 생각이 악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사람(사탄)의 꾀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악인이 주하나님을 배반하고 멸시하여 자기 꾀에 빠진 이유를 악인의 탐욕과 악인의 교만 때문이라고 한다. 악인은 교만하여, 주하나님은 자신들에게 벌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지혜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떠벌인다. 악인은 자신의 만사형통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비웃는다. 악인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악인의 하는 말은 저주와 거짓과 폭언과 욕설과 악담뿐이다. 악인은 무죄하고 가난한 자들을 등쳐먹는다. 시인은 이런 악인을 숲속에서 웅크리고 먹이감을 노리다가 먹이감이 나타나면 무자비하게 덮히는 사자와 같다고 비유한다. 악인은 불쌍하고 가난한 자를 포악하게 대우하며, 악인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악행을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주하나님을 찾는다. 주하나님을 깨운다. 주하나님께 악인을 벌하고 고난받는 자들을 잊지말아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악인이 주하나님을 깔보지 않도록, 악인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게 그냥 나두지 말라고 항변한다. 주하나님이 아니면 핍박을 당하는 자, 가난한 자들이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느냐고, 주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피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주께서 옛적부터 고아와 과부, 곧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도우시는 분이셨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께, 악인을 결박하고, 악인의 잘못을 낱낱이 찾아내어 심판해 달라고 고발한다. 시인은 주하나님이 영원한 심판자라고 노래한다. 이방나라들은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다고 노래한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망한다.)

주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 시인은 겸손한 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주하나님께서 친히 부어주신 마음으로 소원을 아뢰는 겸손한 자들에게 주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신다. 시인은 겸손한 자의 예로 고아와 압제를 당하는 자를 언급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 시편 10편은 표제가 없고 양식상 9편에 이어지는 시라고 한다. 하여간 시인은 하나님부재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찾는다. 주님을 깨운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결론 맺는다. 겸손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악인의) 교만함을 무너뜨리는 성품이다. 이 ‘겸손한 자’라는 단어로 시편들을 검색하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곤고한 자’라고도 번역된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팔복을 떠올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주님은 성도들이 이런 (복된) 마음을 갖도록 준비해 주신다. 성도들이 주님이 부어주신 이런 겸손한 마음으로 소원을 아뢸 때 주님은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 만약 성도에게 하나님부재의 고통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멀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교만하여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성도에게 환난 중의 환난은 외적이 요소라기 보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닌지, 내가 교만해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겸손하게 주하나님께 피하라고 하신다.

시편 9

시인은 전심으로 주하나님께 감사한다.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간증한다.

시인의 간증은 지존하신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한 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의 원수들이 주로 말미암아 도망치다가 넘어져 망했다고 한다. 주께서 시인의 변호사가 되어주셨고 재판관이 되어주셔서 재판이 의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주께서 이방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고 악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다고 한다. 시인은 주께서 대적들이 멸망시키시고 원수들의 성읍을 무너뜨린 일들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조차 없이 많다고 감사한다. 시인은 영존하신 주하나님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고 정의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실 것이라고 노래한다. 압제 당하는 자들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피난처요 요새라고 노래한다. 주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주를 의지한다. 주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께 모인 자들에게 시인은 주를 찬양하며, 주의 행사를 백성중에 선포하라고 명한다. 주께서는 피를 흘리는, 곧 포악자에게 핍박당하는 자들, 가난한 자들의 탄원을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신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자신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한다. 시인을 사망의 문에서 일으켜 달라고 탄식한다. 주께 시인을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받는 고통을 알아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볼보셔야 주께 찬송할 수 있고, 간증할 수 있고 주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이방나라들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악인들은 심판하시는 주하나님을 보며,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악한 행실에 자신을 돌이키지 않았다. 악인들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간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잊어버린) 모든 나라들이 같은 길을 간다. 그러나 주하나님은 궁핍한 자를 기억하시고 가난한 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주하나님은 사람의 계획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신다. 시인은 이방나라들이 주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인생에 (창조주가 아니라 사람의 꾀를 내를 망할 존재라는 것에) 불과하다는것을 알게 해 달라고 탄원한다.

>>  오늘 시는 다윗이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한다. 뭇랍벤은 ‘아들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노래 내용은 ‘레퀴엠’ 곧 죽은 사람을 위한 위령곡이 아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노래하는 것일까?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벌을 받는다. 벌로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그 아이는 다윗의 금식기도에도 이레만에 죽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 모반을 (압살롬의 모반도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야를 살인한 죗값이라고 할 수 있다)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도 ‘차라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하고 울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의 노래는 죽은 아들들을 위한 장송곡이 아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주하나님을 만난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가정에서도 죄를 범하면 벌을 받아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죄를 범하면 벌을 받아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 시인은 벌을 받으면서 하나님부재의 고통을 느꼈다. 그래서 인정머리 없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시인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고통을 애가로 지어 노래하지 않고, 공의와 정의의 주하나님을 찾았다.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고통속에서도, 주님을 찾는 자를 영원히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간다. 사탄은 끊임없이 공의와 정의를 운운하며 하나님은 벌주시는 분이라는 것만 강조할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멸망의 길을 걷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를 찾는 자, 주께 돌이키는 자를 죽음에 (영벌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시인이 공의와 정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한 자, 가난한 자를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와 찬양으로 노래하는 이유다.)

사족: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 있다면 아버지의 부재가 아닐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8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인은 어린 아이들과 심지어 젖먹이 아기들도 주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노래한다. 의인의 회중에 있으면 (주께 피하면) 원수들과 보복자들이 아무런 힘이 없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라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아이들의 주하나님에 대한 찬양소리만으로도 악인들은 잠잠할 수 밖에 없다.

시인은 창세기 1장 특별히 26-28절의 말씀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바울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만, 시인의 노래와 달리 창조주를 모르는 악인은 핑계댈 수 없다고 로마서 1장에서 18-20절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전도자는 전도서 12장에서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세번씩이나 강조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삶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젖먹이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잊어버림은 어찌된 일인가? 중년의 때에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흙으로 돌아가기전,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정말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될 것이다. 전도자는 창조주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전 12:13,14 새번역)]

>>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하게 아름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성도들은  정의와 공의로운 삶으로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이 땅에 채워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들이야 말로 오염된 (타락한) 우주(세상) 속에서 아름다운 주의 이름을 드러낼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시편 7

시인은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자들로부터 주께로 피한다. 주께로 피하지 않으면 사자에게 찢기고 물어뜯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노래를 곱씹어보면 시인은 자신을 쫓아오는 무리와 달리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 자신도 같은 일을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악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피해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고 원수에게서라도 약탈을 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께 피하지 않으면 원수들과 똑같아 질 것을 안다. 주께 피하지 않으면 시인의 생명은 땅에 짓밟힐 것이고 시인의 영광은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시인은 주께 악인들의 무리(회중)에서 나올 수 있도록 법정선언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번 기회에 주께서 만민들을 친히 다스리셔서,  조직적 악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주께서 열방의 심판자가 되셔서 의로운자 성실한 자들을 악한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주께서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주께서 공정한 재판관으로 악인에 대해서는 항상 (변함없이) 심판하시는분이시라고 고백한다. 주께서는 반성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사형을 선언하실 것이요, 사형집행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악인들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이유는 악인이 악을 품고 악을 낳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한자들은 자기 무덤을 파는 자들이라고 한다. 악인들은 남을 해치다가 오히려 제발을 찍는 자들이라고 한다.

시인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주께 (피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존하신 주하나님께 찬양한다.

>> 베냐민 사람 구시가 한 말에 대하여 다윗이 탄식하며 주하나님께 불러드린 노래라고 한다. 베냐민 사람 구시에 대하여 아는 바가 1도 없다.아마 구시는 악한 사회상을 다윗 왕에게 탄원을 하는 듯하다. (아니면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는 다윗에게 거짓뉴스를 바탕으로 저주한 시므이처럼, 구스도 다윗에게 나와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다윗이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지 않는다고 비난했을 수도 있다.) 다윗은 구시가 자신에게 나아와  이스라엘에 만연한 악에 대하여 탄원하는 것을 듣고 (혹은 자신에 대한 저주와 비난을 듣고서), 그의 탄원을 열방에 만연한 악에 대하여 적용하여, 지존하신 주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다윗 스스로 주님을 닮아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왕이 되고자 하는 다짐을 이 노래에 담았을 수도 있다. 나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곧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지 않고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라고 하신다.

>> 주께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특별히 악의 수렁에서 피할 수 있으니 감사의 제목이다. 부나 명예나 건강이나 권력이나 자식이 잘되는 거나 뭐 이런것들만이  감사의 제목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기준의 복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하는 저주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의 고백처럼 주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심이 복이다.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주와 함께하면 모든게 복이다. 모든 것이 감사제목이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

시편 6

다윗이 찬양대의 지휘에 따라 현악기에 맞춰 낮은 음으로 부른 노래라고 한다. 낮은 음은 베이스 소리다. 둥둥둥 박자를 타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흐느낌이 느껴진다. 떡벌어진 어깨의 건장한 남자가 양 어깨를 동시에 들썩이며 우는 모습이 떠오른다.

시인이 주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나보다. 주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주하나님의 용서를 바란다. 얼마나 오랫동안 용서를 구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용서를 구한다. 꿇은 무릎의 뼈마디가 쑤셔오도록 용서를 구한다. 의로우신 주하나님을 알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도 주하나님께서 시인으로부터 얼굴을 돌리셨나보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얼굴을 시인에게로 다시 돌려 (돌아와) 자신을 봐달라고 탄원한다. 제발 자신의 마음을 알아보시고 주하나님의 자비로 살려달라고 탄원한다. 죽으면 더 이상 주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니, 죽으면 주께 나와 감사할 수 없으니 죽기전에 살려달라고 매달린다. 시인은 울다가 지쳤다. 밤마다 눈물의 기도를 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으면 눈물바다에 침대가 둥둥 뜨고 침구가 다 젖어벼렸다고 비유할까? 얼마나 울었으면 울다 울다 이제는 주님은 간곳없고 대적들에게 둘러 쌓여 눈앞이 캄캄하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시인은 주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시인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라고 명한다. 울며 울며 기도한 시인에게 주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다. 시인은 아마도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었나보다.  다윗의 시이니, 악인의 꾀를 따라 간음하고 죄인의 길에 서서 살인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인구조사를 했다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니 시인은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나를 떠나라라는 명령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던  다윗 자신에 대한 처절한 명령일 것이다. 모든 악에서 떠나겠다는 다윗 스스로의 다짐일 것이다.

주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시인의 애원을 지금까지 들어주셨다. 그래서 이번 기도도 들어주실 줄 시인은 확신한다. 원수들은 시인이 용서받자 당황한다. 주하나님의 무궁한 인자하심에 두려움을 느끼며 물러간다. 사탄은 아마도 시인에게 간음과 살인과 오만의 잘못은 용서 받을 수 없어라고 속삭였을 것이다. 어차피 용서 받을 수 없으니 계속 악에 머물라고 시인을 꼬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께서는 악에서 떠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죄는 동이 서에서 먼것 같이 기억하지 않으신다. 시인의 원수들은 떨며 시인을 떠나간다.

>> 나는 간음하고 살인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았던 다윗보다 그래도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가 간음한 자요, 형제에게 화를 내면 살인한 자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여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과 같이 울면서 애원해야 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라고, 죄인의 길에 서라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라고 속삭이는 사탄의 소리에 미혹되는 마음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바울은 적용한다. 사탄의 소리에 미혹되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근심하는, 또는  많은 부를 지키기 위해 창고를 지어야 한다는 근심은 세상근심이요 사망을 이룬다고 바울은 적용한다.

>> 아침에 하나님 뜻대로 행하겠다고 기도하고 나갔던 시인이 저녁에는 돌아와 그날을 반성하며 운다. 그만큼 세상은 시인에게도 우리에게도 녹록하지 않다.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음행과 더러운 행실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살펴야 한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라고 경고하면서 어리석은 자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울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나를 떨게 했던 모든 것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쉬지말고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