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주하나님께서 멀리계심에 (벌을 받는) 고통으로 주하님을 찾는다. 악한자는 얼씨구나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시인을 압박한다. 악한자는 이때다 싶어 벌주시는 하나님만 강조한다. 악인은 시인에게 하나님께 돌이켜 용서를 구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시인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악인의 생각이고, 악인의 이런 생각이 악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사람(사탄)의 꾀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악인이 주하나님을 배반하고 멸시하여 자기 꾀에 빠진 이유를 악인의 탐욕과 악인의 교만 때문이라고 한다. 악인은 교만하여, 주하나님은 자신들에게 벌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지혜가 더이상 필요없다고 떠벌인다. 악인은 자신의 만사형통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비웃는다. 악인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악인의 하는 말은 저주와 거짓과 폭언과 욕설과 악담뿐이다. 악인은 무죄하고 가난한 자들을 등쳐먹는다. 시인은 이런 악인을 숲속에서 웅크리고 먹이감을 노리다가 먹이감이 나타나면 무자비하게 덮히는 사자와 같다고 비유한다. 악인은 불쌍하고 가난한 자를 포악하게 대우하며, 악인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악행을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주하나님을 찾는다. 주하나님을 깨운다. 주하나님께 악인을 벌하고 고난받는 자들을 잊지말아달라고 탄원한다. 시인은 악인이 주하나님을 깔보지 않도록, 악인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게 그냥 나두지 말라고 항변한다. 주하나님이 아니면 핍박을 당하는 자, 가난한 자들이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느냐고, 주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피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주께서 옛적부터 고아와 과부, 곧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도우시는 분이셨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께, 악인을 결박하고, 악인의 잘못을 낱낱이 찾아내어 심판해 달라고 고발한다. 시인은 주하나님이 영원한 심판자라고 노래한다. 이방나라들은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다고 노래한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망한다.)
주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 시인은 겸손한 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주하나님께서 친히 부어주신 마음으로 소원을 아뢰는 겸손한 자들에게 주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신다. 시인은 겸손한 자의 예로 고아와 압제를 당하는 자를 언급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 시편 10편은 표제가 없고 양식상 9편에 이어지는 시라고 한다. 하여간 시인은 하나님부재의 고통 속에서 주님을 찾는다. 주님을 깨운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결론 맺는다. 겸손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악인의) 교만함을 무너뜨리는 성품이다. 이 ‘겸손한 자’라는 단어로 시편들을 검색하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곤고한 자’라고도 번역된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팔복을 떠올리게 되는 단어들이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주님은 성도들이 이런 (복된) 마음을 갖도록 준비해 주신다. 성도들이 주님이 부어주신 이런 겸손한 마음으로 소원을 아뢸 때 주님은 귀를 기울여 들으신다. 만약 성도에게 하나님부재의 고통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멀어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교만하여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성도에게 환난 중의 환난은 외적이 요소라기 보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닌지, 내가 교만해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지 않은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겸손하게 주하나님께 피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