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

시인은 주하나님께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읊조린다. (카톡 대답이 늦는다고 불평하는 듯한 반응이며, 신음소리는 내는 반응이며 한숨을 내쉬는 반응이다.) 시인은 왕이신 하나님께 큰 소리로 기도한다. 주하나님께 아침부터 기도한다. 주께서 응답하시길 바라며 기도한다. (아마 시인은 잠자리에 눕기전에도 기도했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전에는 시인의 뜻을 아뢰었다면, 아침에는 시인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듣고자 하는, 곧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기도를 드린다.) 시인은 주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께 기도해도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주하나님께서 모든 행학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된 자들을 망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하나님께서는 피흘리기까지 착취하는 자들과 속이는 자들을 싫어하심을 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무궁한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주님을 만나 (주님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 경배한다. (주의 집에 들어갔음에도 시인이 성전을 향하여 예배한다고 노래하는 이유는 감히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 문안한 시인은 주님께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주님의 의로 자신을 인도하시고, 시인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에서 자신이 행하는 것을 원수들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원수들이 혀로는 아첨하지만, 원수들의 입에서 나오는, 원수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불신과 완악함이 사망으로 이끌지 않느냐고 주께 탄원한다. (원수들의 길에서 행하는 것은 사망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원수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달라고 탄원한다. 자기 꾀에 빠진 원수들이, 그들의 허물로 말미암아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주를 배신한 자들이라고 고발한다. 한편으로 시인은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주님의 보호로 기뻐하며, 영원히 기뻐 외치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와 더불어 즐거워 할 것을 기대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주의 은혜로 의인에게 주신 복을 지켜 달라고 노래한다.

>> 오늘  시는 다윗이 나팔 소리에, 곧 빵빠레에 맞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어제 비파소리에 맞춘 노래가 핍박받는 시인이 신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며 하는 탄원이라면, 오늘 노래는 시인이 아침에 깨어 주님의 은혜로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려는 다짐을 담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라도, 스스로는 악인도 죄인도 오만한 자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있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인은 저녁에 드린 자신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새벽에) 주님의 뜻을 듣고 하루 일을 시작하길 원한다. 시인이 어젯밤 평안히 누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자기 꾀에 빠져 사망의 길을 가는 원수들과 달리 시인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걷겠다고 노래한다.

>> 주님,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 (12, 새번역)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삶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신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알아 주신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됨이 성도의 기쁨이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양의 기쁨이듯.

시편 4

1-4시인은 의로우신 주하나님께 데이트를 신청한다. 주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아뢰어 위로 받길 원한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데이트를 주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세상 사람들은 주하나님과 데이트를 즐겼던 시인의 영광을 욕되다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으로 치장하는 자들이 아닌가? 시인은 주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택해서 데이트하심을 알기 때문에,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시인의 데이트 신청을 들어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으로 치장한 자들에게, 경건한 자를 택하시는 주하나님께 화를 내어 범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싸돌아 다니면서 범죄하지 말고 자리에 누워 잠잠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고 노래한다.

5-8 시인은 주하나님과 데이트를 원하는 사람은 의의 제사를 드리고 주하님을 의지하라고 노래한다. 사람들이 미팅에서 누가 킹카냐고 (선을 보일 자, 가장 좋은 것을 줄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시인은 주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대답한다.  시인의 마음에는 주하나님만으로 꽉차있다고 대답한다. 세상사람들이 물질의 풍성함을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 시인은 주께서 시인을 마음에 품으신 것을 아는 기쁨으로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미팅에서 주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할 지 않을지 걱정하며 잠을 설치지 않을 것이다. 평안히 자리에 누울 것이다. 시인의  삶을 의미있게 하실 분은 오직 주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를 택하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이다)

>> 오늘 시는 다윗이 찬양대의 지휘에 따라 비파소리에 맞춰 부른 노래라고 한다.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과 함께함의 열매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사람들은 호가호위라고 놀릴지 몰라도, 다윗은 주님의 권세가 자기 것인양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주님처럼 의롭다고 교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도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건한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셨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다윗은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데이트는 즐거울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울 때 위로 받고 싶을 때 더 만나야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주께서 자신의 마음에 두신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하나님께 삶의 이유를 둔다고 노래를 마친다.

>>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 (8, 공동번역) 나도 하나님 덕에 산다.

시편 3

1시인은 주하나님께, 시인 자신에게 대적이 많다고, 시인을 치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고 노래를 시작한다. (2편의 시인은 세상 왕들과 지도자들이 주하나님께 직접적인 대적을 했다고 노래하는데, 3편의 시인은 많은 대적들이 자신을 노린다고 한탄한다. 마치 시인 자신이 하나님편에 섰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고 탄원하는 듯.)

2-4 시인은 대적자들이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코지 하는 것 보다, 대적들이 시인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비웃는 것에 더 힘들어 한다. 그러나 시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주하나님이 시인의 방패시요 영광이시요 시인을 떳떳하게 자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나아가 하나님과 카톡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음성통화도 하는 사이라고 노래한다.

5-7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시인의 출입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평안히 자고 깬다고 노래한다. 시인을 애워싼 대적이 천만 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주무시지 않으시고 시인을 구원하시고 원수의 뺨을 치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시는 주하나님을 꿈꾼다.

8 시인은 구원이 주하나님께 있다고 노래한다. 주의 구원하심이 주의 백성에게 내리는 주님의 복이라고 노래한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구원하신 주님을 알기에 이번 탄원에도 응답하실 주님을 알기에)

>> 시인은 하나님편에 선다. 시인은 물리적으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지만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자다. 시인은 저녁에 자고 아침에 깨는 것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심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있는 것을 본 것처럼 , 시인과 함께한 자가 천만 인의 대적보다 많다는 것을 (영안을 열어) 본다.

>>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내리는 복,  곧 하나님의 축복은 구원이다 (행위다). 이 구원 받은 자가 행복하다 (상태다). 시편 1,2편에서 시인이 사용한 복이라는 단어는 행복이다. 오늘 시편3편 마지막 절에서는 사용된 복은 (무릎꿇고) 복을 받는 행위다. 곧 행복이란 구원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축복이라고 노래한다. 구원말고 다른 축복은 없다. 구원말고 더 행복한 것도 있을 수 없다.

>> 시편 3편의 표제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시’라고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었을 때나, 사방의 적들을 물리친 것을 (결과를)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내리는 주의 복이라고 노래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울 때 주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과정이) 주의 복이라고 노래한다. 복이 있는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무릎꿇고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자다. 눈을 들어 주를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

시편 2

시인은, 복이 있도다, 주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 주하나님의 진노가 급할 때, 주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악인과 같이) 망하게 되었을 때, 주하나님의 아들에게 인사하고 (입맞추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노래한다(12). 주하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며 노래한다(11). 높은 지위에 있는 자, 많이 배운자, 재판관들에게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교훈을 배우라고 명한다 (10).  높은 지위와 많은 지식과 재판하는 권력도 쇠 몽둥이를 가진 사람에 의해 질 그릇 같이 부숴질 것이기 때문이다(9).  주하나님께서 쇠막대기를 가진 자에게 이방나라도 유업으로 주시고 땅 끝까지 소유하게 하실 것이니, 도움은 주하나님께 구하라고 명하신다(8). 시인은 쇠막대기를 가진자가 주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하나님께서 낳은 자라고 선포한다. 시인은 이 선포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노래한다(7). 주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거룩한 산 시온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웠다(6). 주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심으로 주하나님의 아들을 왕으로 시온에 세우시자 세상 왕들은 놀랐다(5). 주하나님께서는 세상 왕들을 조롱하며 조소하셨다(4). 왜냐하면, 세상 왕들이 모여 주하나님의 징계와 벌을 달게 받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3). 징계의 이유는 세상 왕들이, 지도자들이 주하나님과 주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기 위해 꾀를 부렸기 (모반했기) 때문이다(2). 시인은 이방나라들과 이방 민족들의 꾀,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모든 것과 모든 이론은 (그리스도에 의해) 무너뜨려질 헛된 일을 꾸미는 것이라고 노래한다(1).

>> 가끔 시편의 시를 마지막절로부터 읽는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헛되다고 (복이 없다고) 시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마친다. (오늘 처럼 마지막부터 읽으면 1편과 마찬가지로 복되다로 이작하여 헛되다(망한다)로 마친다.) 헛되다는 것은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라는 시편 1편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이어 받는다. 사람들의 꾀는 사람들을 정직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행위다. 당연히 복이 없다. 아니 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전도자의 노래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들의 꾀는 하나님의 정직에 비하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이요 주께서 쇠몽둥이로 무너뜨리실 이론이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고린도에 편지한다.

>> 시인은 그리스도께서 쇠막대기를 가지고 계심을 알라고 노래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자, 곧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쇠막대기가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을 이루게 하는 회개로 이끄는) 솜방망이에 불과하겠지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사람들의 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자들에게는)  세상근심으로 사망을 이루는 쇠몽둥이가 될 것이다.

>> (시인은 쇠막대기를 노래하지만)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말고, 하나님께  피할 수 있도록 중보하시는 예수께 나아와 입맞추라고 하신다.

시편 1

복이 있는 사람. 시편에서 시인들이 노래하는 복은 일상의 복이다. 일상에 더해지는 복이라기 보다는 삶의 희노애락에서 누리는 복이다. (그래서 시편 94편의 시인은 주로부터 징벌을 받는 것도 복이라고 노래하고 128편의 시인은 정당한 수고로 먹는 사람이 복되고 형통하다고 노래한다.) 이렇듯 오늘 시인이 ‘복되도다’라고 노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주하나님을 경외하든, 주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든, 주하나님의 용서함을 받든, 주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든. 주하나님을 알고, 주하나님께 아신 바 된 사람이 복되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면 주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하나님께서 정결하지 않은 곳에 오시지도 않겠지만 내 마음에 주심을 모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귀에 듣기 좋은 칭찬소리라서가 아니다.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교훈으로 심지어 명령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이 책망을 교훈을 명령을 말씀하시는 참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묵상한다.

하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을 말씀의 시냇가에 심으신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내리게 하신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서  계절에 따라 합당한 열매을 맺게 하신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게 하신다. 복 있는 사람의 형통함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이다. 처음엔 한그루 나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에스겔의 환상과 같이 한그루가 아니라 나무들로 번성할 것이다. (에스겔은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악인이란  결국 복이 없는 사람이다. 복이 없는 사람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한다. 광풍이 아니라 작은 바람에도 날려 흩어지고 만다. 특별히 더 악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는 자다. 아니 두 주인을 섬기는 자들, 곧  바람피는 자들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곧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도 묘사한다. 이런 자들은 주께 무엇을 받을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시인의 노래는 분명하다. 의인들의 길은 주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안다고 하시나 악인들은 모른다고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가 양들을 알고 양도 선한 목자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께 아신 바 됨이 (인정받음이) 복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모임에 함께 (속) 하는 것이 복이다. 임마누엘 외에 다른 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