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3-2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바울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당시 문화에따라 아내들에게 잠잠하라고 권면/명령 했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예수를 경외함으로 피차복종해야 하는 관계라고 가르친다. 여기서도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능동적이고 책임감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차별없이 적용해야 한다.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라고 권면한다. ‘너희 모두는 사랑안에서 행하라’ 라는 의미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라고 한다. 곧 일의 성취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문안하며 편지를 마친다.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간에 서로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지체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기쁨이요 평안이라고 한다. 서로 순종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을 알아주라고 당부한다.  ….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의외?의 말로 편지를 맺는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하나로 결론 짓는다면 주에 대한 사랑이 없음이 아닐까? 바울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분쟁하고 음행하고 우상숭배하고… 곧 저주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심판을 다시 오실 주님께 맡긴다. 바울은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한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그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하고, 바울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축원한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의 사랑이 아니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사랑안에서 행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사랑 안에서 순종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하신다.

 

고린도전서 16:1-12

*** 한국생활, 집이 아니라 선교관 생활을 하다보니 말씀묵상을 정리하기 쉽지 않다. 온 가족이 한방에서 잔다. 아마 아이 셋이 생긴 후로는 처음이 아닌가 한다.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한방에서 자니 좋다. ㅋㅋ

>> 교회가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된 다른 교회를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연보다. 지교회 내에서도 가난한 지체를 도울 수 있고, 우주적인 교회를 생각하고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를 도울 수 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좋은 방법은 대면하여 교제하는 것이다. 코로나로 비대면 교제를 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이를 잘 반증한다. 그렇다고 대면교제만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함께 머물수도 있지만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비대면 교제도 필요하다. 온라인 묵상나눔이 그런점에서 비대면 교제의 좋은 장이 될 수 있겠다.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낸다. 자신의 가르침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디모데를 보내 간접적인 교젤를 나눈다.

>> 바울은 아볼로를 형제로 생각한다. 아니 바울과 아볼로는 형제다.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에 아볼로파를 형성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사역자였지만 지금은 고린도교회에 갈 뜻이 없다고 바울에게 말한 듯 하다. 아볼로도 기회가 있으면, 곧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바울에게 답을 한 것 같다. 바울과 아볼로는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고린도 방문을 계획하거나 미루거나 했다.

>>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상부상조

고린도전서 15:35-49

하늘에 속한 형체와 땅에 속한 형체가 다르며 하늘에 속한 영광과 땅에 속한 영광이 다르듯 죽은 자의 부활도 다르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썩을 것으로 심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욕된 것으로 심으나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약한 것으로 심으나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육의 몸으로 심으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바울은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다고 가르친다. 부활은 바로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거듭남의 연장이다.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땅에 속한 육의 사람이었다. 둘째 사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부활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것이다. …

고린도전서 15:20-34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성도들의 믿음도 헛것이요 성도들은 여전히 죄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사망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 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첫 열매고, 그리스도 다음에는 주께서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께 복종하는 모든 만물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도 대신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부활은 단순히 육적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는 이유다.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육적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영적 부활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썩어질 육체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부활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과 같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몸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으로 깨닫고 적용한다.  예수님을 제외한 성경에 나오는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썩어질 몸으로 살아났다. 다시 죽을 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부활의 조건으로 선한행실을 분명히 말한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을 알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부끄러워하라고 말한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선한 행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깨어 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죄를 행한다면,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런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신다.

고린도전서 15:12-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고 변증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도 헛것이요, 성도들이 복음을 믿음도 헛것이며,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증인으로 들통날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한다.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시한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않을셨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성도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반복하고 반복한다. 죽은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들의 믿음도 헛되고 성도라고 불리는 너희 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평가한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에 참여하지 못한다. 죽은 자의 (성도들의) 부활도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삶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난 사람들이다.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성도는 죽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그 믿음은 헛된 믿음일 수 밖에 없고 여전히 죄의 종일수 밖에 없다. 영적인 거듭남은 다가올 육적 부활의 근거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에 (성전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될 것이다. 성도들이 부활체로 하나님의 성전의 지체가 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이다. 부활만이 (부활신앙만이) 온전한 임마누엘을 누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