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1-23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인, 사도, 예수를 만난 사람, 주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특별히 주안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는 고린도 성도들이 아는 바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행한 일을 통해 자신의 사도성도 입증된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바울의 사도권은 의심받았다.

바울의 사도권이 의심받은 이유는 지극히 세상적이었다. 첫번째가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라고 바울을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하지 않았던가?) 두번째는 결혼이었고 세번째는 100% 후원을 받지 못해 일을 해야 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매매하는 것은 일상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일상에서의 축복과 거리가 먼 바울이었기에 사도권을 의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일상의 복을 누리는 권리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이런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친다. 주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다고 가르친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복음 전도의 삶이 자신의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복음전도로 먹고마시는 것이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복음전도의 댓가는 복음으로 받아야 할 권리를(일상의 축복을) 자신을 위해 다 쓰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얻는 것이라고 밝힌다.

바울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복음을 받는 사람 과 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유대인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바울은 여러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원했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댓가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위해) 산 것이 아니라 복음이 (복음자체가) 되기 위해 살았다고 고백한다.

>>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권변호보다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친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물건을 사고 파는 일상 속에서, 곧 세상에서 상을 받고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나라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일상의 삶을 살았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자로 높아진 삶을 살지 않았다.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참여했다. 열매를 맺기 위해 포도나무이신 예수께 붙은 가지가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에 참여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도록 복음의 일꾼이 되어 받는 모든 괴로움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정의했다. 성도들도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 복음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도록 살라고 하신다.

고린도전서 8:1-13

바울은 (교회공동체가) 음행을 피하기 위한 또 다른 적용으로 우상 제물에 관하여 교훈한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대신 사랑이 덕을 세운다고 교훈한다. 바울은 지식이 많다고 해도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고 교훈한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일도 아무일도 아니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하늘과 땅에 신이라고 불리는 자가 많이 있지만 모두 우상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한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 계시며, 성부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고 한다.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도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성도들은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한다고도 말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고 지적한다. 이런 우상을 섬기는 습관으로 우상의 제물을 먹고, 하나님을 아는 선한 양심이 약하여 지고 더러워졌다고 한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먹고로 하나님앞에서 (믿음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면 영원히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다. 아는 것은 사귐이다. 오늘 바울은 창조주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형제들을 실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형제들을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또 다른 분쟁을/분파를 낳는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공동체를 더럽히는 첫번째 이유로 분쟁/분파를 지적했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고린도전서 7:25-40

바울은 결혼/비혼에 관한 의견을 이어간다. 미혼자들에게 비혼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이미 혼인관계에 있다면 이혼하지 말라고 한다. 만약 이미 이혼을 했다면 아내를 새로 구하지도 말라고 한다. 결혼자체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으로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혼을 했어도 결혼관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슬픈 일이나 기쁜 일에도 얽매이지 말고 소유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교훈한다. 세상에서의 소유는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세상일에 얽매여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결혼관계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은 부부관계의 의무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교훈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고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다시한번 획일된 적용을 하지 않는다. 결혼이든 비혼이든 (물론 바울은 비혼을 더 선호하지만) 주안에서 행하라고 명령한다. 바울 자신은 비혼으로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영적인 은사라고 고백한다.

>> 주님말고 기쁘게 해야할 배우자가 있고 또 자녀가 있다는 것은 온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결혼은 분명 음행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제도지만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제자들에게 비혼은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곧 천국을 위해 고자된 자라고 적용한다. 그렇다고 결혼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엡 5:21) 성도라면 개인적인 탐욕으로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지말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라’ 라는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서로를 기쁘게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7:1-24

주와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니 음행을 피하라고 교훈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남녀관계에 대하여 적용한다. 첫번째가 결혼이라는 관계가 남여간에 음행을 피하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가르친다. 부부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분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떨어져 있으면 절제하지 못하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기 쉽다고 한다. 바울은 이것을 음행을 피하기 위한 부부관계에 대한 적용이지 명령은 아니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다고 적용한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현재 남편이 없으면 독신으로 (비혼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교훈한다.

이미 결혼했다면 이혼하지 말고, 이혼했다면 원래 남편과 (혹은 아내와) 화합하든지 이혼한 상태로 지내라고 권면한다. 심지어 불신 아내나 불신 남편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불신 남편과 불신 아내가 성도인 아내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약 불신 남편과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락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평중에 부부관계를 맺게 하셨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불신의 남편과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한다.

바울은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모든 교회에 명령한다. 육신적 할례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명령한다. 신분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종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자유인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적용한다. 더이상 세상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명령한다.

>>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것보다 더 상위법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요구하는 계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곧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다양하다.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순종시키고 하나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라고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한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의 통일성, 곧 부르심에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명령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 곧 임마누엘이다. 음행을 피하는 삶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정결한 삶이다.

고린도전서 6:12-20

바울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죄에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다. 불의한 자였지만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또 모든 것이 가하다고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오직 주를 위하여 있고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머리되신 주께서도 몸된 교회를 위해 계신다. 개인적이기보다 공동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편지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도 고린도교회 성도공동체를 뜻한다. 성도 각자 각자도 그리스도의 지체지만 각각의 교회공동체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성도 각자각자가 범죄하면 안되듯이 지교회 공동체도 범죄하면 안된다. 교회를 창녀처럼 만들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교회공동체가 정결하고 거룩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창녀와 합하면 창녀와 한 몸이 된다. 당연히 주와 합하면 주와 한 몸이 된다. 물리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지만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라고 표현한다. 주님과 합하기 위해서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하여금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인 줄 알라고 말한다. 주와 합하였으면 우리는우리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성도들을 사셨다고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곧 교회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한다.

>>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하는 것을 맛볼 수 있는 곳이 결국은 교회공동체다.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말/마음/뜻으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각자를 위하여 분쟁과 음행을 버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성도는 배만 부르면 된다는  우리의 낮은 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지체로 사는 사람들이다. 오직 주의 몸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