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11

바울은 분쟁/분파, 음행에서 재판소송 문제로 넘어간다. 바울은 다툼이 있을 때 왜 성도 앞에서, 곧 교회의 판결을 구하지 않고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느냐고 묻는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종말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할 성도라면 이세상에서의 작은 일 정도는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가르친다. 성도는 천사도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현실은 일상의 작은 문제들에 대한 송사가 있을 때 세상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형제간의 일들을 판단할 지혜가 없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형제간의 문제를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가져가느냐고 따진다. 형제간에 피차 고발하는 것 자체가 허물이라고 지적한다. 형제간에 서로 소송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에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불의를 당하지 않으려고 또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 도리어 형제에게 불의를 행하고 형제에게 피해를 주고 형제를 속이게 된다고 꼬집는다.

바울은 불의를 당하지 않기위해 불의를 행한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불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나열한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 연애, 도둑질, 탐욕, 술취함,  모욕, 사기를 일삼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한다. 바울은 고리도교회 성도들도 이런 자들이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죄에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임을 알라고 한다.

>> 바울은 (어제) 음행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교회 밖 사람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교회내에 있는 악행을 내쫓으라고, 곧 교회 내의 정결이 우선이라고 교훈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불의, 곧 의롭지 못한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취함 모욕 사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교회내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세상 일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런 자들이었지만 죄씻음을 받았듯이 (교회내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나는 깨끗하니 너를 심판한다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으니 너도 용서 받을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어떻게? 형제들이 서로 송사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5:1-13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교회공동체를 해치는 분쟁을 지적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두번째? 문제를 제기한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음행을 교회공동체가 통한히 여기지 않고 음행한 자를 쫓아내지 않은 교만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우주적 교회의 문제라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지만 영적으로는 한 몸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정죄한다. 영적인 공동체가 이런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육적인 죄성을 멸망시켜 주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받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받는다. 음. 영적인 교회공동체라면 이런 자는 사탄에게 내어주어 교회공동체내에 있는 육적인 성품을 멸절시켜야 영적인 교회공동체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면  될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적용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실족케 하느니 연자맺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고, 손이나 발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범죄하게 하는 손/발/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범죄하게 하는 손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구절의 적용일까?)

바울은 영적이어야 할 교회공동체에 있는 이런 자는 경계해야 할 누룩이라고 지적한다. 고린도교회가 영적인 공동체라고 자랑한다고 해도 이런 자들이 있다면 결국 온 교회 공동체가 육적인 공동체가 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묵은 누룩, 악한 누룩을 제거하고 순전함과 진실한 공동체가 되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심지어 음행하는 자들은 사귀지 말라고 (먼저 쓴 편지에) 경고했었다. 교회내 음행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고 교회밖 음행은 사귀지 말아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 거짓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 나와 따로 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교회 공동체 내에 있는 형제가 음행, 탐욕, 우상숭배, 모욕, 술취함, 거짓을 하거든 그런 자들과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 내에서는 이런 일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교회내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공동체 내에 있는 악한 사람은 교회공동체가 알아서 내쫓아야 한다.

>>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교회 내에 있는 악행은 침묵하고, 교회 밖의 악행에 대해서는 검뎅이가 묻을까봐 닥달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교회 내에 있는 악행은 내쫓으라고 가르친다. 성도들은 교회 내의 정결을 우선시 해야 한다. 사회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6-21

>> 한국에서 둘째날 아침. 아니 오후.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매일성경 본문을 펴다.

바울은 아볼로와 함께 보인 본을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라고 한다. 바울은 아볼로와 나뉘어 분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처럼 서로 대적하거나 서로에 대하여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앞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교회내의 분쟁이라고 적용하지 않았던가. 분쟁의 이유를 교만이라고 지적한다.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왕이 되고자 하는 왕노릇하고자 하는 교만이라고 지적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인, 곧 가르치는 자로 부르신 바울과 아볼로를 낮은 자의 위치에 두셨다고 고백한다.  끄트머리 두셨다고 한다. 끄트머리는 가장 낮은,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사역자들은 결코 큰 자,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게 되어 성도들을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세워가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아마도 아볼로와)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는 자들이고, 박해를 참는 자들이고, 비방을 받지만 권면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세상 가치 기준으로는 더럽고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한다.

사역자들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듯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가르치는 스승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아비가 되어야 한다. 아비가 되어 본을 보여야 한다.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모데를 보낸다. 아비의 심정으로 보낸다.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부르며 보낸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올 일이 없다고 교만스럽게 말을 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바울 자신이 다시 방문하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말로 따지지 않고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본을 보이겠다고 편지한다. 야단치러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의 본을 보이겠다고 편지한다.

>> 사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바울이 말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어도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말이 아닌 능력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역사에도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자들은 어떤가?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큰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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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16-4:5

16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은 오직 성전 밖에 없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것을 알라고 강한 어조로 반문한다.

17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고린도교회 공동체도 거룩하다고 가르친다. // 문맥상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은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을 지적하는 것이다. 분쟁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 더럽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회내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불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18-20 세상에서 지혜있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 차라리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된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지혜있다고 하는 자들이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세상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헛것에 불과하다. 아니 하나님은 세상지혜를 헛것으로 만드신다.

21-23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만물이 다 우리 것이 된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우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다.

4:1-2 바울은 가르치는 자, 사역자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라고 편지한다. 맡은 자는 신약에서는 주로 청지기로 번역된다. 청지기라고 종보다 높은 자리가 아니다.  소명이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해야 할 일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일이 주어진 자들은 충성해야 한다. 신실함을 추구해야 한다.

3-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자신을 평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의 판단은 작은 일이며, 다른 사람의 판단에 스스로도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책할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책할 것이 없다고 의로다 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주님의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주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다. 심판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도록, 주게서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때에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 밤새 뱅기타고 한국도착… 계속 눈이 감긴다.

고린도전서 3:1-15

바울은 우리가 (바울 일행이, 혹은 사역자들이) 주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주를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 사람의 지혜와 말이 아닌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한다고 썼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 성도들을 진단한다.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이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고린도 형제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 품에 있는 갓난아기 같다고 말한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젖은 빨고 있으나 신령한 밥은 감당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 증거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시기와 분쟁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시기와 분쟁이 여전히 육신에 속해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증거라고 한다.

십자가의 도는 같은 말/마음/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인데 바울파 아볼로파로 나뉘었으니 고리도교회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바울은 심고 물을 준 자신이나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믿음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각기 자기의 행한대로 상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동역자에 불과하고 자신들이 심고 물을 준 성도들은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에 속한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한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심었고, 당연히 아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물을 주었다고 가르친다. 앞으로 사역할 사람도 바울과 아볼로의 사역 위에 어떻게 세울까 조심하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힌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위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인데 사람들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세워도 결국에는 다 태워질 것이라고 하신다. 태워지고 남는 것이 성도들의 공적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는다고 한다. 공적이 불타도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공적이 있었다면 불 가운데서라도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기 같다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한다. 고린도 교회에 있는 분쟁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증거라고 한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에게  무엇이든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바울은 개인이 아니라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고린도교회(공동체)에도 같은 적용을 한다.

>> 성도는, 사역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자들이다. 금/은/보석/나무/풀/짚 등 무엇으로 세우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우는 자들이다. 그 무엇으로 세워도 심판의 불을 견딜 수 없다. 오직 남는 것은 ‘터’인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따라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남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는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골 2:6,7 현대인의 성경) 라고 가르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야 한다. 사역자라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도록 세워야 한다. 금/은/보석도 자랑할 것이 못되고 나무/풀/짚이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터’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