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18 읽기

1-2 (그러므로, 곧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으니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새로운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들을 하지 않고,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았다. 대신 진리를환히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서와 모든 사람들에게 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음을 떳떳하게 내세운다고 말한다.

3-4 (만의 하나) 바울 일행이 전하는 복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다고 말한다. 멸망하는 자들은 믿지 않는 마음이 어두운 자들이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신 자들이라고 말한다. (요 1: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3:19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5-6 바울 일행은 자기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한다고 말한다. 예수를 주인으로 선포하는 자신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종이라고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의 마음속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바울 일행에게 (고리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도) 주셨다고 말한다. (요1: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7-9 바울 일행은 이 보물을 (곧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 다시말해 요1: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자신들은 질그릇이요 자신들 속에 간직한 보물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라는 보물을 간직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요 1:12-13). 자신들은 이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심지어)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담대히) 고백한다.

10-12 바울 일행은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자신들의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편지한다. 예수의 죽으심이 질그릇과 같은 자신들이 간직한 보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을 간직하는 이유는 예수의 생명 또한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이유를 바로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남은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이 자신들의 죽을 육신에 간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죽고 자신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때, 생명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13-15 바울은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성경을 인용한다. 바울 일행은 믿음으로, 믿음의 영을 가지고, 곧 성령에 순종하여 말한다고 선언한다. 주 예수를 살리신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자신들도 살리시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과 함께 세워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일, 곧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바울 일행과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모든 일은 다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16-18 바울 일행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서 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자신들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한다. (겉사람은 외면이요, 곧 육체요, 속사람은 내면, 곧 영이라고 해석해 왔는데, 오늘 아침에는 겉사람은 질그릇된 ‘나’요 속사람은 내속에 있는 보물 곧 ‘예수’라고 하신다.)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을 일시적이고 가볍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이 주어질 것임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은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고 말한다. (믿음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일꾼은 낙심하지 않고 떳떳하게 일해야 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듯이 전함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종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라는 보물을 담은 질그릇이다. 질그릇이 예수를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의를 베푸는 일은 바로 질그릇은 죽고 질그릇 속에 살아 있는 예수를 드러내는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전함을 받은 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그래서 겉사람인 나는 쇠하여야 하고 속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는 흥해야 한다. 영생을 소망하는 성도의 자세다.

고린도후서 3:1-18 읽기

1-3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이 자신들을 치켜 올리는 말을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 일행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추천장을 가지고 간 것도 아니고, 또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로부터 추천장을 받아서 떠난 것도 아니라고 밝힌다. 손으로 써준 추천장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 자체가 바울 일행이 자랑할 추천장이라고 말한다. 종이에 써 준 추천장이 아니라 바울 일행의 마음에 적혀 있고, 바울 일행을 만나는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곧 바울 일행의 추천장인 줄 알고 읽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바울 일행의 사역에 필요한 추천장, 소개장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께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자신들의 추천장이 되도록 봉사했다고 말한다. 거듭 이 추천장은 만년필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썼으며,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판에 쓴 것이라고 말한다.

 4-6 바울 일행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추천장/소개장이요, 자신들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추천장이 되도록 봉사했다는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봉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격을 주셨다고 겸손히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 언약도 문자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자로 쓰여진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지만 성령은 생명을 준다고 가르친다.

7-11  바울은 모세가 돌판에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도 비록 곧 사라질 것이었지만 모세 얼굴에 광채가 났음을 상기시킨다. 이 죽음을 이르게 하는 율법을 선포한 모세에게도 이런 영광이 나타났는데, 영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느냐고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반문한다.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친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빛나던 것(율법)의 영광은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광으로)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라져 버릴 율법이 주어질 때도 영광이 있었다면 길이 남을 (영생을) 약속하는 성령의 법의 영광은 무궁할 것이라고 말한다.

12-18 바울 일행은 이런 소망, 곧 의를 베푸는 직분,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대담하게 처신한다고 말한다. 모세는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렸지만, 바울 일행은 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완고해져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 모세가 광채를 가렸듯이 구약성경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구약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의 참 뜻을 가리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야 구약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주님의 영이시다. 주님의 영이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럴 때 성도들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  성도들은 서로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데 추천장이 되어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다른 지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봉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간에 추천장이 되고 서로간에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세워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완고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맘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완고한 마음이야 말로 벗어버려야 할 너울이다. 바울은 자화자찬하지 않는다. 바울의 권면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는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성도는 결국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 존재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다. 영이신 주님께서, 곧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고린도후서 1:23-2:17 읽기

23 바울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신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목숨을 걸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린도에 재차 방문하는 일정이 바뀐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마음에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풀어나간다. 다시말해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는 것보다 (내 고집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에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24바울 일행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가르치고 감독하는 자로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방문하기 보다는 동역자의 입장에서 방문해서 함께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고 전한다.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이미 믿음에 서있는 자라고 선언한다.

2:1-4 이미 믿음에 서있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가서 동역의 기쁨을 나누기보다 가르치고 감독하고 책망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서 고린도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기쁘게 해 줄 사람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인데, 어떻게 자신이 가서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마음 아프게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문하기보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마음아프게 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4-8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상황을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심지어 많은 눈물의 기도로 편지를(전서를) 썼다고 말한다. 물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한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에  괴로워 하면서 아픈 마음과 눈물의 기도로 편지를 썼지만, (바울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은)  바울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 당사자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프게 한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한다. (누가 어떤 벌을 받았는지?) 그러니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은 바울과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아픔을 준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편지한다.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슬픔은, 아마도 구원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근심이 아닐까?) 바울은 오히려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9-11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 이유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지 시험하여 알아보려고 썼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순종해야 할 가장 큰 제목은 용서라고 한다. 서로 용서해야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속셈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지 않느냐고 말한다.

12-13 바울은 드로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갔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거기서도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서, 디로를 만나기 위해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다.

14-17 바울은 바울 일행의 일정이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 일행은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멸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된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곧 생명의 향기, 영생의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된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사꾼이 아니라 일꾼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 내 고집보다 (내 서원보다) 하나님의 뜻에 (성령의 인도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함께 세워져 가는 기쁨을 누리라고 하신다. 책망보다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할 마음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고 하신다.

고린도후서 1:12-22 읽기

12-14바울 일행의 자랑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처신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곧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편지한다. 사실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에 대하여 부분적인 이해 밖에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의 자랑이요, 바울 일행이 고린도 교회와 가가야 성도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서로에게 자랑이 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나보다. (그러나)

15-19 바울은 서로에게 서로가 자랑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편지을 이어간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거듭된 은혜를 받게 하려고 방문 계획을 짤 때, 고린도 – 마케도니아 – 고린도 – 유대의 일정을 짰었다. 그런데 일정에 차질이 생겼나 보다. 바울은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마음이 없었으면서도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것처럼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라고 편지한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듯 바울 일행도 신실하다고 말한다. 바울 일행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 일행도 신실하다고 강조한다.  

20-22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곧 성도들의 뜻 대신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도들은 내 뜻을 고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아멘’하는 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고린도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튼튼히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바울 일행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로 성령을 주셨다고 적는다. 곧 방문 계획이 바뀐 것은 바울 일행이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부어주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듯 하다.

>>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바울은 서로를 자랑으로 여겨야 할 성도들 간의 신실함은, 성도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쳐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신실하다는 것은 성도들이 삼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것에 바탕을 둔다고 말할 수 있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 신실해 진다. 이럴 때 서로에게 자랑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길이다.

고린도후서 1:1-11 읽기

발신자: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수신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

문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한다. 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환난중의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로하실뿐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 성도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성도들에게도 넘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위로는 성도들에게 임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고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다시말해 바울 일행에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이 넘치는 것도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편지한다. 바울 일행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을 위로 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의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고난을 능히 견디기를 바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뿐만 아니라 위로에도 참여하는 자가 될 줄을 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을 위로한 것 같이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바울 일행을 위로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언급한다. 바울 일행은 죽음직전까지 가도록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했다. 스스로를 위지할 수 없는 사형수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망에서 바울 일행을 건지셨고, 건지시며, 건지실 것이라고 (믿음과 소망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바울 일행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울 일행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은혜를 입어, 많은 사람의 감사의 제목이 될 수있도록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에게 기도요청을 한다.

>>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이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자비와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한다. 예수께서는 자비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고 슬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는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친히 이 하나님나라의 복을 누리셨다. 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바울은 편지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빈다. 고난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것이 평화다. 다른 복은 없다.  

>> 고난이 있는 곳에 위로가 있듯이 기도의 제목이 감사의 제목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바울은 생을 마감하면서 디모데에게도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길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되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고난받음이 위로다. No pain, No 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