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16-28 읽기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정에 전해졌고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기뻐해서 요셉을 불렀다. 바로는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라고 형들에게 명하라고 했다. 바로가 야곱의 가족에게 애굽의 좋은 땅도 주고 애굽의 기름진 것을 먹도록 베풀겠다고 했다. 아예 자녀들과 아내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수레가지 내 주었다.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아끼지 말라고 하였다.

요셉은 바로의 명령대로 했다. 형제들에게 선물도 주었다. 베냐민에게는 더 많이 주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보낼 선물도 수나귀 열필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가나안을 오갈 때 필요한 양식도 실어주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오가면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한다.

애굽의 수레를 이끌로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도착한 이들의 행령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라 관심조차 없었을까? 야곱은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다는 아들들의 말을 믿지 못해 어리둥절 했다. 밖에서 대기중인 애굽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했다. 이스라엘(야곱)은 ‘족하도다’라고 말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 왜? 자꾸 애굽이 하늘나라로 연상될까? 애굽을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도 없고 바로가 하나님일 수도 없고 바로의 신하들이 천사일 수도 없고 요셉이 예수님 일 수도 없는데… 그리고 왜 자꾸 시편 23편이 입속에서 맴돌까? 시편 23편은 분명 다윗의 노래인데, 야곱의 노래처럼 들린다. 야곱이 족하다고 내뱉었은 말은 분명 다윗이 노래한 ‘부족함이 없다’ 와는 오히려 정반대 같은데. 야곱이 족하다는 말은 세상풍파를 겪을대로 다 겪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다윗은 영혼의 소생을 노래했지만 야곱은 육신의 기운이 소생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다윗은 주께서 베풀어주실 밥상, 주께서 기름을 머리에 부어주시며 존귀케 해 주심, 주께서 채워주실 포도주잔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노래하는데… 야곱은 기껏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야곱은 요셉을 만나 애굽땅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시편 23편을 읊조리게 하고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 그러나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야곱 같이, 한국 교회는 진정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말씀이 여전히 문밖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말씀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께서 여전히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예수를 만나야 기운이 소생하고 영혼이 소생하는데. 살아계시며 다시 오실 주님을 보기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데… 요셉의 기우처럼 여전히 다투고만 있는 한국교회가 아닌가… 오늘은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 하늘의 좋은 땅, 곧 하나님나라의 좋은 것이 다 우리 것이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