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유다를 앞장세워 애굽으로 갔다. 고센에 도착하자 요셉이 총리 수레를 타고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나왔다. 요셉은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다’며 위로했다.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 야곱에게 바로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알려주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아버지 이스라엘과 형제들이 가솔과 모든 가산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땅에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형들 중 다섯을 먼저 바로에게 보였다. 바로는 요셉이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요셉이 일러준대로 답을 하고 고센 땅에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는 요셉이 통역을 했을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요셉이 애굽땅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버지와 형들이 원하는 대로 고센땅에 거주하도록 하고, 형제들에게 바로의 가축도 관리하도록 명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했다. 바로가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형들은 바로에게 자신들을 종들이라고 낮추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선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했다. (창세기 초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복을 베푸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을 받는 자가 무릎을 꿇고 겸손히 순종하것이라고 적용했었다. 영국여왕이 기사작위를 수여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기보다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표현은 공동번역에서와 같이 바로에게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야곱이 만수무강을 빌자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다. 야곱은 백삼십년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130년을 살았지만 조상들만큼 (아브라함은 175년을 이삭은 180년을 살았다.) 오래 살지는 못했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바로의 만수무강을 빌고 물러났다.
요셉은 바로에게 허락받은대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목축하기 좋은 땅 라암셋을 주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의 식구 수대로 먹을 것을 주었다.
>> 고센 땅. 가나안에서 광야를 거쳐 제일 처음 나일 평야을 맞다닥뜨리는 곳이다. 다시말해 가나안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흉년이 끝나면 언제든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애굽문화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요셉이 어릴 때 들은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남은 5년의 흉년을 마치면 곧 돌아갈수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을 수 있다.
>> 야곱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서른을 갓넘은 요셉의 삶을 형통했다는 것과 극히 대조적인 삶이다. 솔직히 야곱의 삶이 험악했던 이유는 야곱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외형적으로보면 열두아들을 거느린 족장이 되었으니, 아니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인데도, 속이고 속은 자신의 삶을 험악한 삶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반면 요셉의 삶이야 말로 형제들에게 팔리고 노예가 되었고 옥에 갇혔으니, 외형적으로 험악하게 살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성경은 형통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왔느냐,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곧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요셉처럼 이땅에서 총리의 지위로 부름받았다 하더라도 이땅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땅에 미련을 두면 삶이 험악해 진다. 주의 날이 내일인 것처럼 살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