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7:27-48:7 읽기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 야곱이 애굽 땅에 거한지 십칠년이 되었다. 야곱이147세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죽음을 압두고 요셉을 불러 자신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의 묘지에 장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했다. 야곱은 요셉에게 거듭 맹세하라고 요청했고 요셉은 야곱의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한번 더 맹세했다. 이스라엘은 침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했다. 곧 침상을 벗어날 기력이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야곱이 병들었다는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이 요셉에게 전해졌다. 요셉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에게 갔다. 요셉이 왔다는 소리에 이스라엘은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다. 그리고 요셉에게 벧엘에서 (가나안 땅 루스에서) 하나님의 복을, 곧 언약을 받을 것을 말해주었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의 언약을 요셉에게 상속했다.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야곱은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자신의 아들과 같이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므낫세와에브라임의 동생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이름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라헬을 에브랏 길, 곧 베들레헴 가는 길에 장사한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다시말해 자신이 묻힐 조상의 무덤, 곧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에 라헬과 함께 묻히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하다.

>> 흉년이 끝났으니 야곱은 온 가솔과 가산을 이끌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갔을 법도 한데 이스라엘 족속은 고센에 눌러 앉아 생육하고 번성했다. 늙은 야곱은 아들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을 것이고, 아들들은 생업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불러 가나안에 장사해 줄 것을 당부하고 거듭 당부했다.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에도 요셉만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에게 왔다. 나머지 아들들은 야곱이 불러 모을 때까지 생업에 바빴으리라. 야곱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복은, 곧 하나님의 언약임을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요셉에게 두배의 몫이 상속되도록 했다. 야곱은 베들레헴 길에 묻힌 라헬의 옆에 장사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가 요셉을 낳은 라헬임을 확인시켜준다.

>>> 임종.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임종을 [ ①병자에게 꼭 물어둘 일이 있으면 내용을 간추려 병자가 대답하기 쉽게 묻고 대답을 기록한다. ②가족은 속히 직계 존・비속 및 특별한 친지에게 기별하고, 병실에 모여 병자의 마지막 운명을 지킨다.] 라고 적는다. 요셉이 장자권을 가지고 야곱의 임종을 주관했다. 이런 요셉에게 야곱은 하나님의 복, 곧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먼저 남겼다. 그리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임종이 가까왔음을 형제들에게 기별했을 것이다.  

 >>> 어디에 묻힐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상속하는 일이야 말로 임종의 핵심이다.

창세기 47:13-26 읽기

기근이 더욱 심해졌다. 사방에 굶주린 사람이 넘쳐났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은 황폐해 갔다. 요셉은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돈을 긁어 모았다. 돈이 떨어지자 곡식을 가축과 바꾸어 주었다. 가축이 떨어지자 사람들에게는 몸과 땅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결국  몸과 땅을  팔아 바로의 종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요셉은 모든 땅과 백성이 바로의 소유가 되도록 했다. 다만 애굽 제사장들은 바로가 주는 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부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요셉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종자를 주고 추수의 오분의 일을 세금으로 거둬들이고 오분의 사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애굽 토지법을 세웠다.

>>  애굽 백성이 사는 길은 바로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바로의 종이 되기 위하여 애굽 백성들은 요셉을 주로 삼고 순종해야 했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성도들은 예수를 주로 삼고 순종해야 한다. 요셉은 애굽 백성과 토지를 모두 사서 바로에게 바쳤다. 예수는 성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

>> 이제 애굽백성들은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로 양식을 삼아야 한다. 애굽의 백성들은 요셉이 세운 이 법에 따라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았다. 애굽의 백성들은 요셉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바로에게 충성하겠다고 (종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십분의 일도 아니고 오분의 일이라 좀 과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으나, 성도들은 십분의 십, 곧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우리 허물과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 성도들은 예수께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해야 하고 성부 하나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야 한다. 
 
>> 하나님나라는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소유의 전부를 다 팔아야 살 수 있다고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쳐주셨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녹을 받으며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46:28-47:12 읽기

야곱은 유다를 앞장세워 애굽으로 갔다. 고센에 도착하자 요셉이 총리 수레를 타고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러 나왔다. 요셉은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네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다’며 위로했다.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 야곱에게 바로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알려주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아버지 이스라엘과 형제들이 가솔과 모든 가산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땅에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형들 중 다섯을 먼저 바로에게 보였다. 바로는 요셉이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요셉이 일러준대로 답을 하고 고센 땅에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는 요셉이 통역을 했을 것이다.) 바로가 요셉에게, 요셉이 애굽땅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버지와 형들이 원하는 대로 고센땅에 거주하도록 하고, 형제들에게 바로의 가축도 관리하도록 명했다.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했다. 바로가 형들에게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형들은 바로에게 자신들을 종들이라고 낮추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선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했다. (창세기 초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복을 베푸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을 받는 자가 무릎을 꿇고 겸손히 순종하것이라고 적용했었다. 영국여왕이 기사작위를 수여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낮추기보다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표현은 공동번역에서와 같이 바로에게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야곱이 만수무강을 빌자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다. 야곱은 백삼십년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130년을 살았지만 조상들만큼 (아브라함은 175년을 이삭은 180년을 살았다.) 오래 살지는 못했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바로의 만수무강을 빌고 물러났다.

요셉은 바로에게 허락받은대로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목축하기 좋은 땅 라암셋을 주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의 식구 수대로 먹을 것을 주었다.

>> 고센 땅. 가나안에서 광야를 거쳐 제일 처음 나일 평야을 맞다닥뜨리는 곳이다. 다시말해 가나안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흉년이 끝나면 언제든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애굽문화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요셉이 어릴 때 들은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다는 반증이다. 어쩌면 남은 5년의 흉년을 마치면 곧 돌아갈수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을 수 있다.
>> 야곱은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대답했다. 서른을 갓넘은 요셉의 삶을 형통했다는 것과 극히 대조적인 삶이다. 솔직히 야곱의 삶이 험악했던 이유는 야곱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외형적으로보면 열두아들을 거느린 족장이 되었으니, 아니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인데도, 속이고 속은 자신의 삶을 험악한 삶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반면 요셉의 삶이야 말로 형제들에게 팔리고 노예가 되었고 옥에 갇혔으니, 외형적으로 험악하게 살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성경은 형통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아왔느냐,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곧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요셉처럼 이땅에서 총리의 지위로 부름받았다 하더라도 이땅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땅에 미련을 두면 삶이 험악해 진다. 주의 날이 내일인 것처럼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46:1-27읽기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헤브론을) 떠나 브엘세바에 (야곱의 고향?)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 희생제사를 드린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셨다. 야곱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이다.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다.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다. 요셉이 네 임종을 지킬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야곱의 아들들은 바로가 보낸 수레에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모든 가산을  이끌고 브엘세바를 떠나 다함께 애굽으로 갔다. 야곱이 애굽으로 갈 때 야곱의 자손들은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포함해서 70명으로 불어났었다. (창세기 기자는 이미 죽은 유다의 두 아들과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을 포함시켜 66이라는 불완전한 숫자를 70이라는 완전한 숫자로 바꾼다. 칠십이라고 두번 적었다.)

>> 브엘세바.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조부 아브라함이 장막을 쳤던 곳이다. 야곱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야곱이 애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친 곳도 브엘세바에서였다. 야곱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다. 이런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  것은 브엘세바가 야곱에게 고향이어서라기 보다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이 미지의 땅을 향할 때면 하나님은 어김없이 나타나셔서 언약을 기억하게 하신다.

>>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으로 이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언약의 절정은 ‘내가 너와 함께’이다. 곧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이 구원이요 영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다. 자꾸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 살려고 한다. 이런 자는 후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누리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 야곱은 자손들을 셌다. 하나 둘 셋… 도합 66이다.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유다의 두 아들과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을 더해 야곱의 자손이 70이라고 셈하신다. 완전하다. 사람의 눈에는 부족해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하다.

창세기 45:16-28 읽기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정에 전해졌고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기뻐해서 요셉을 불렀다. 바로는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오라고 형들에게 명하라고 했다. 바로가 야곱의 가족에게 애굽의 좋은 땅도 주고 애굽의 기름진 것을 먹도록 베풀겠다고 했다. 아예 자녀들과 아내들, 그리고 늙은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수레가지 내 주었다.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니 아끼지 말라고 하였다.

요셉은 바로의 명령대로 했다. 형제들에게 선물도 주었다. 베냐민에게는 더 많이 주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보낼 선물도 수나귀 열필에 가득 담았다. 그리고 가나안을 오갈 때 필요한 양식도 실어주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에게  오가면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한다.

애굽의 수레를 이끌로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도착한 이들의 행령은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라 관심조차 없었을까? 야곱은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다는 아들들의 말을 믿지 못해 어리둥절 했다. 밖에서 대기중인 애굽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했다. 이스라엘(야곱)은 ‘족하도다’라고 말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 왜? 자꾸 애굽이 하늘나라로 연상될까? 애굽을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도 없고 바로가 하나님일 수도 없고 바로의 신하들이 천사일 수도 없고 요셉이 예수님 일 수도 없는데… 그리고 왜 자꾸 시편 23편이 입속에서 맴돌까? 시편 23편은 분명 다윗의 노래인데, 야곱의 노래처럼 들린다. 야곱이 족하다고 내뱉었은 말은 분명 다윗이 노래한 ‘부족함이 없다’ 와는 오히려 정반대 같은데. 야곱이 족하다는 말은 세상풍파를 겪을대로 다 겪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다윗은 영혼의 소생을 노래했지만 야곱은 육신의 기운이 소생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다윗은 주께서 베풀어주실 밥상, 주께서 기름을 머리에 부어주시며 존귀케 해 주심, 주께서 채워주실 포도주잔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노래하는데… 야곱은 기껏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야곱은 요셉을 만나 애굽땅의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시편 23편을 읊조리게 하고 하나님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 그러나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야곱 같이, 한국 교회는 진정 예수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말씀이 여전히 문밖에서 대기 하고 있는데 말씀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께서 여전히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예수를 만나야 기운이 소생하고 영혼이 소생하는데. 살아계시며 다시 오실 주님을 보기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데… 요셉의 기우처럼 여전히 다투고만 있는 한국교회가 아닌가… 오늘은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 하늘의 좋은 땅, 곧 하나님나라의 좋은 것이 다 우리 것이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