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1-15 읽기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시종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요셉이라고 알리고 펑펑울었다. 요셉이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시종들이 눈치챘고 이 소식은 바로의 궁정까지 전해졌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 야곱의 안부부터 물었다. 혼비백산 놀란 것은 오히려 형들이었다.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 탄원하던 유다마져도 움찔하고 뒷걸음질 쳤을 법했다. 요셉은 형들을 가까이 불러 자신이 요셉임을, 형들이 애굽에 판 요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것에 대해 근심하거나 한탄하지 말라고 했다. 이 모든 일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요셉은 이제 속히 가나안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을 모셔오라고 형들에게 당부했다. 고센땅에 머물며 아직 다가올 5년의 흉년동안 부족함이 없이 지내라고 아버지 야곱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요셉은 자신이 다시한번 열둘의 하나 요셉이라고 강조한다. 형제들에게 요셉이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를 아버지 야곱에게 전하고 속히 모시고 오라고 부탁한다.

운다. 요셉과 베냐민이 껴안고 울었다. 요셉은 형들과 일일이 입마추며 안고 울었다. 그제서야 형들의 입이 떨어졌다.

>> 요셉이 열일곱이 갓넘어 팔려와 서른에 총리가 되고 칠 년의 흉년과 이 년의 흉년을 보냈으니 2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강산이 두번 변하고서야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고백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후대에 사는 우리들은 안다. 20년씩 20번이 지나야 출애굽으로 하나님의 큰 구원이 한 걸음 더 내딛고, 다시 20년씩 60번은 더 지나야 예수님이 오신다. 요셉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몰랐다. 그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성실(충성)했을 뿐이다.  >> 우리도 종말의 때를 모른다. 그저 임마누엘의 하나님께 성실하라고 하신다.

>> 함께 울라. 안고 울라. 세상은 요셉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형들과 같다. 세상은 지적질이 아니라 교회가 입맞춰 주고 안고 울어주길 바랄것이다. 이미 한국교회에 등을 돌린 세상을 향해, 교회는 형제들에게 팔리고 누명쓰고 옥에 갇히고 총리가 되어서도 인종차별을 겪었을 요셉처럼 하나님께 (주어진 삶에) 성실(충성)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세상을 품을 수 있다.

창세기 44:18-34 읽기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사정하겠다는 뜻이리라.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라헬에게서 두 아들을 낳아 특별히 사랑했는데 하나는 나가서 찢겨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 둘째 베냐민도 돌아가지 못하면 슬퍼 죽게 될 것이라고 읍소했다. 그리고 유다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베냐민을 데리고 왔으니 자기를 베냐민 대신 잡아두고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과 함께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 유다는 요셉에게 가까이 나아가, 요셉을 주인이라고 부르고 요셉은 바로와 같으니 노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 달라고 말한다. 유다는 읍소하는 핵심은 자신의 생명보다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 대한 걱정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야곱에게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이제는 바로와 같은 요셉의 손에 달렸으니 요셉에게 부디 노하지말고 베냐민은 보내주고 자신을 잡으라고 한다.

 >>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을 회복했다고나 할까?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으로 바로와 같은 요셉의 권위에 일종의 도전장을 던진셈이다. 유다는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으로 바로와 같은 요셉에게 읍소한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이 이겼다는 것을. 부모공경과 형제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세상을 이길 힘이다.

창세기 44:1-17 읽기

요셉은 형제들과 만찬을 나누고 형제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양식을 자루에 채우라고 청지기에게 명했다. 그리고 받은 양식값도 각자의 자루에 넣고 은잔을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 넣으라고 명했다. 요셉의 청지기는 요셉의 명령대로 했다.

다음날 아침 형제들은 나귀에 양식을 싣고 가나안으로 떠났나. 멀리가기 전에 요셉은 청지기에게 형제들을 뒤따라가서 ‘어찌 선을 악으로 갚느냐’ 라며 잔을 찾아오라고 명했다. 청지기는 형제들을 따라사서 요셉의 말대로 했다.

형제들은 청지기를 주라고 부르며 결단코 그런 일이 없다고 항변했다. 먼저 번 돈도 도로 가져온 자신들이 어찌 주이느이 집에서서 은금을 도둑질 했겠냐며, 만일 잔이 누구에게서 발견되면 그는 죽을 것이요 나머지 형제들도 종들이 되겠다고 맹세한다. 청지기는 발견되는 자만 종이 될 것이요 나머지는 죄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각자의 자루를 풀어조사했다.

나이 많은 자부터 시작하여 베냐민까지 조사한 결과 잔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다. 형제들은 옷을 찢고 다시 요셉이 있는 성으로 돌아왔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처분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요셉은 ‘나는 점을 잘치는 사람이다’라며 형제들을 떠봤다.

유다가 유구무언이라고 대답했다. 자신들의 정직함을 나타낼 수 없다고 탄식했다. 이미 하나님께 죄를 지은 자들이고 자신들은 그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유다는 베냐민에게 일어난 일보다는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며 말했으리라) 그러니 차라리 베냐민과 함께 형제들 모두가 요셉의 노예가 되겠다고 말했다. 요셉은 베냐민 한 명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아버지가 있는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말했다.

>> …

창세기 43:16-34 읽기

>> 요셉의 집 청지기. 그는 요셉의 형들의 하나님을 알았고 요셉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알았다. 요셉을 형통하게 한 요셉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요셉이 청지기에게 어릴적 얘기를 했나보다. 요셉은 과연 어떤 하나님의 이야기를 청지기에게 들려주었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형통케 하심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 요셉은 애굽사람이 되었을까? 애굽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었다고 한다. 이인자인 요셉과 같이 먹으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리라.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유대인이 이방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는다는 율법은 애굽시절에 들어온 전통이 아닐까? 신분에 따른 차별, 민족에 따른 차별. 다른 신분 다른 민족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차별이 없다.  차별이 없다. 차별하지 말라고 하신다. 

창세기 43:1-15 읽기

장정 9명이 얼마나 많은 곡식을 사올 수 있었을까?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이 다 떨어졌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다시 양식을 사오라고 명했다. 유다가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곡식을 파는 ‘그’사람을 볼 수 없으니 베냐민도 함께 보내달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야곱)은 왜 베냐민이 있다고 말하여 자기 마음을 찢어놓느냐고 말했다. 아들들은 정탐꾼으로 오해받아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대답한 것이지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고 항변했다.

유다가 다시한번 나섰다. 베냐민과 함께라면 곧 가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우리 아이들도 다 살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을 베냐민의 담보로 걸겠습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아버지께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압니다. 베냐민 문제로 지체하지 않았다면 벌써 두번은 갔다 왔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스라엘은  만의 하나 지난번 곡식을 사올 때 착오가 있었을 것을 대비하여 예물도 준비시킨다. 곡물 값을갑절로 가져가라고 한다. 베냐민도 데리고 가라고 허락한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모든 아들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자식을 잃고 안잃고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고백한다.

이스라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요셉 앞에 섰다.

>> 야곱이 벧엘에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세상 복이었다. 이스라엘은 드디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다. 생명을 구한다. 요셉을 잃고 시므온은 없어지고 베냐민은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잃게 되면 잃으리라’ 라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인생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으면 야곱의 삶처럼 오히려 잃거나 없어지거나 빼앗긴다. 그러나 야곱의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는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로다’보다 약하다. 모든 것을 잃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은 남기 때문이다.

>> 결정적인 장면에서 또 두 아들을 담보로 한 르우벤은 사라지고 자기자신을 담보로 한 유다가 또다시 리더쉽을 발휘한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 주는 자가, 곧 ‘죽으면 죽으리로다’의 사람이 진정한 리더가 된다.

>> 바울은 아예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선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