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4편 읽기

1-3 시인은 구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일들을 조상들이 전하여 준 것을 듣고 자랐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번창하게 하신 일을 듣고 자랐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을 차지한 것은, 조상들이 무력으로 차지한 것도 승리한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배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4-8 시인은 조상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왕이요 자신의 하나님(신)이시요, 야곱(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주님의 능력으로 적을 쳐부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적을 막아냈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자신의 활이나 자신의 칼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오직 주님만이 주님의 백성은 승리 거두고, 적군은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언제나 하나님만 자랑한다고,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한다고 노래한다.9-16 그런데, 시인은 주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웃나라들로부터 치욕을 당하기 때문이다. 승전이 아니라 패전의 소식만 들리기 때문이다. 적에게 밀리고 적에게 약탈당한다. 주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여러 나라에 흩어졌다. 주의 백성들이 노예로 팔렸다. <그렇다고 노예장사로 이익을 남긴 것도 아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그저 이웃나라의 이야기거리,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 시인은 포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당한 수치로 얼굴조차 들 수 없다고 노래한다. 사방에서 시인을 조롱하고 모독하고 욕을 하고 무서운 눈길을 노낸다. 17-22 시인은 당돌하게 주의 백성은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치욕이 닥쳤다고 항변한다. 마음으로 주님을 배반한 적이 없으며, 발이 주님의 길을 벗어난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왜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승냥이의 소굴로 밀어 넣으시냐고, 깊고 깊은 어둠으로 덮으시냐고 따진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거나, 다른 신들에게 기도했다면 모를까? 백성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주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셨느냐고 반문한다. 백성들이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 주님 때문이라고 시인은 모든 책임을 주님께 전가한다.23-26 시인은 주님을 깨운다. 주무시지 마시고 주의 백성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히 지켜달라고 노래한다. 주의 얼굴을 백성에게서 돌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백성의 고난과 억압을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백성들이 무덤 속에 있는 처지라고 매달린다. “주님 일어나셔서 우리를 어서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다 주님 때문이라고 책임을 주님께 전가한다. (시인은 하나님에 관해 들었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얼굴을 백성에게서 돌리지 마시고 백성의 고난과 억압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시인을 이끌어 주시고, 시인을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시인으로 영원히 하나님 집에 살게 하심을 꿈꾼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의지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 2020년도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1 새해에도 하나님나라를 꿈꾸며/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43편 읽기

1 시인은 41편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자신의 노래가 틀리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 변호해 달라고 노래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인정을 나누는 것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거짓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의 조류에서 구해 달라고 노래한다.2 시인은 하나님을 요새요 피난처로 삼지만, 현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갑질하는 사람들에게 시인 자신도 짓눌림 당하기는 마찬가지라,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며 노래한다.3 시인은 그래도 주님의 빛과 진리를 따라가면 닿을, 주님이 계시는 주님의 장막을 바라본다. 시인은 주님이 계시는 주님의 장막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구한다.4 시인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기쁨으로 반겨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안기길 꿈꾼다.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시인을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로 찬양하길 원한다. 5 시인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낙심되며, 괴롭다. 그럼에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린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주의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꿈꾸며, 주님만이 시인의 구원자(도움), 시인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한다.


// 성도의 길도 고진감래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난다. 그러나 고진은 잠깐이요 감래는 영원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이끌려 사는 성도들은, 23편 시인이 노래한대로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 영원히 산다. 43편의 시인도 이것을 소망하며 현실의 괴로움을 달랜다.

// 예수께서도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라고 환난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평화를 얻는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시편 42편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인은 사람들이, 원수들이 날마다 시인을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비웃고 빈정대는 것에 크게 낙심하고 괴로워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인터뷰를 해도, 병마에서 회복된 간증을 해도, 심지어 기쁜 감사 노래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해도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 역시 주님을 찾아 목마른 사슴처럼 헐떡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지 않는가? 시인은 심지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호소한다. 사람들과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고사하고 시인 자신이 하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세상 사람들과 원수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41편의 시인에게서 찾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길은 이웃사랑이다. 먼저는 성도 간의 사랑이겠지만, 이웃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한 자,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을 본다.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을 세상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눅 11:37-41) 식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게, 겉은 깨끗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에 이어 삭개오를 다시한번 소환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구제, 곧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본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 이것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우리의 답이 되어야 한다.

시편 41:1-3 읽기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주님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게 재난이 닥칠 때에 그를 구해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신다. 세상 사람들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복 있는 사람을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신다.


// 시편 41편의 시인은 4절부터 시인 자신, 곧 ‘나’를 노래하기 전에, 1-3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복 있는 사람을 일반화 시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적용한다. 따라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다. 시편 1편의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라고 노래(정의) 한다. 따라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으며, 천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 편에 서는 것이다. 시인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보살피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돌보다/보살피다’ 라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는 세 번 모두 ‘배상’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시말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배상의 성격이 강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였을 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를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삭개오 집에 이르렀다고 축복하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닌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공동체다움을, 사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시편 40:7-8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노래하는 시인은, 주님께서 시인을 멸망의 구덩이와 진흙탕에서 건져주시고, 반석을 딛고 서게 해 주시고, 걸음 걸음을 안전하게 해 주심을 7-8절로 정리한다.”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시인이 노래하는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은 생명책일 것이다. 시편의 시인들은 ‘기록’이란 단어를 생명책(69:28), 등기부(87:6), 출생부(139:16), 심판책(149:9) 과 연관되어 사용했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았기에, 혹은 시인은 자신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함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 하고, 주님의 법을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노래한다.시인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더 많아 희망을 잃은 그 순간에도 주님의 너그러움을 구한다.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주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한다. 시인이 주님을 기다리고, 시인이 주님을 신뢰하고, 시인이 주님을 찾는(의지하는) 이유는 시인의 마음 속에 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