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인은 사람들이, 원수들이 날마다 시인을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비웃고 빈정대는 것에 크게 낙심하고 괴로워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인터뷰를 해도, 병마에서 회복된 간증을 해도, 심지어 기쁜 감사 노래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해도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 역시 주님을 찾아 목마른 사슴처럼 헐떡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지 않는가? 시인은 심지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호소한다. 사람들과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고사하고 시인 자신이 하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세상 사람들과 원수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41편의 시인에게서 찾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길은 이웃사랑이다. 먼저는 성도 간의 사랑이겠지만, 이웃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한 자,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을 본다.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을 세상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눅 11:37-41) 식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게, 겉은 깨끗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에 이어 삭개오를 다시한번 소환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구제, 곧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본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 이것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우리의 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