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0:1-12 읽기

1-3 성전을 성결케 하고 성전예배를 회복시킨 히스기야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주님을 기리며 유월절을 지키도록 초청하였다. 히스기야는 대신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의논하여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한다. 유월절을 한달 미룬 것은 성결 예식을 치른 제사장이 부족했고 백성들도 정해진 첫째 달까지 예루살렘에 모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4-9 히스기야와 온 회중은 유월절을 한달 미루는 것을 좋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여겼다. 히스기야는 유다지역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오랫동안 율법에 기록된 절차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파발꾼들은 히스기야의 명을 따라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남아 있는 백성들, 곧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벗어난 당신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이다. 범죄한 조상이나 동포들을 닮지 말아라. 범죄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하도록 버려두신 것을 여러분은 직접 보았다. 목이 곧은 조상과 같이 고집부리지 말고 주께로 돌아오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겨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진노를 거두실 것이다. 주님께로 돌아오면, 동포들을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자비를 베풀어 동포들을 이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10-12 파발꾼들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의 각 성읍을 두루다니며, 멀리 스블론에까지, 히스기야가 보낸 편지를 알렸다. 그러나 사람들는 파발꾼들을 비웃고 조롱했다. 그래도 아셀과 므낫세와 스블론 사람들 가운데서 몇몇은 겸손하게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왔다. 하나님은 유다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히스기야의 조서에 따르도록 감동시키셨다.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히스기야가 선포한 유월절 메세지는 분명하다. 범죄한 조상이나 동포들을 닮지 말고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외면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히스기야 유월절에서 놀라운 것은 남유다에 국한된 메세지가 아니라 이미 앗시리아에게 망해버린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패망한 북이스라엘에서는 아셀과 므낫세와 스블론 자손 중 적은 수만 겸손한 마음으로 순조하여 예루살렘에 왔지만 말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유다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유월절에 참여하도록 감동시켜 주셨다.
// 율법에 기록된 절차대로 유월절을 지키고 안지키고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절기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곧 성탄절이다. 성탄절도 이미 절기로만 남아있는 듯 하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동정녀 탄생과 아기 예수 이야기를 비웃고 조롱할지라도, 겸손하게 아기 예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성탄의 의미를 선포하고 이웃들을 초청하도록 감동시켜 주시길…

역대하 29:20-36 읽기

20-24 (성전과 성전 기구들을 깨끗하게 하고 봉헌했다는 레위사람들의 보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다음날 아침 일찍 대신들을 불러모아 성전으로 올라갔다. 히스기야 왕은 왕가의 죄를 속죄가기 위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속죄제를 드리게 하였다. 제사장들은 어명을 받아 (율법이 정한 규정에 따라) 온 이스라엘을 속하는 속죄제를 드렸다.

25-30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지시하신 대로,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각종 악기로 연주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의 시작을 알리고, 온 회중이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번제가 마칠 때까지 찬양과 나팔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제사를 마치고 왕과 온 회중이 다 엎드려 경배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과 선견자가 지은 시로 주님을 찬송하게 했다.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하고 경배했다.

31-36 히스기야는 몸을 깨끗하게 한 제사장들이 주님께 구별되었다고 선언하고 백성들에게 각종 제물과 감사제물을 성전으로 가지고 오라고 선포했다. 온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드렸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번제물도 가져왔다. 회중이 가져온 번제물이 너무 많은데, 번제물을 잡아 제물을 준비하는 제사장의 수가 너무 모자랐다. 그래서 성결예식을 마친 제사장이 보강될 때까지 제사장들의 친족인 레위 사람들이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거들었다. (사관은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들보다 더 성실하게 성결을 지켰다고 평가한다.) 제사장들은 번제물뿐만 아니라 화목제물도 도맡아 바쳐야했다. 이렇게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지만 하나님이 백성을 도우셔서 잘 진행되었고 히스기야와 온 백성은 기뻐하였다.

>> 성결케 된 성전에서 히스기야 왕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먼저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장소보다 예배자가 성결케 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속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로 나가는 것이 곧 찬양과 경배의 시작임을 알았을까? 번제의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찬양과 나팔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명했다. 사관은 번제물을 준비해야 할 성결케 된 제사장이 적어 레위 사람들이 일을 거들었다고 기록하면서,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들보다 더 성실하게 성결을 지켰다고 평가한다. 우선 제사장 수가 부족했던 이유는 아하스의 배교에 참여했던 제사장들을 배제했기 때문이거나, 직무에 참여하려면 제사장들은 더 특별한 정결의식을 거쳐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하여 일반 레위 사람들은 숫적으로도 많았고 일상의 거룩함만 유지하면 언제든지 성전에서 제사를 돕는 직무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레위 사람들이 제사장들보다 더 성실하게 성결을 지켰다는 사관의 평가를, 아하스 때, 배교의 시간에 제사장들은 (어쩔 수 없이) 이방제사에 동원되었지만, 레위 사람들은 거룩함을 지킬 수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 성전이 성결케 되고, 속죄제와 찬양과 경배와 화목제로 예배자들도 성결케 된 결과는 기쁨이었다. 부와 재물과 영화가 아니라 예배의 기쁨이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이 성도의 거룩한 삶의 기초가 된다. 만약 예배드리는 기쁨이 없다면 일상의 삶이 주께 거룩하게 구별되이 드려지는 지 살펴야 한다. 일상에서 성실하게 성결을 지키는 것이 예배의 첫걸음이라고 하신다.

역대하 29:1-19 읽기

1-2 히스기야는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되었다. 히스기야는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히스기야의 어머니 아비야는 스가랴의 딸이다. 히스기야는 다윗이 한 모든 것을 그대로 본받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다.
3-11 히스기야는 왕이되자 마자 (첫 해 첫째 달에) 먼저 폐쇄되었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했다. 제사장들을 모으고 제사장들로 하여금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성전을 성결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말끔히 없애라고 명령했다. 히스기야는 조상이 죄를 지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등졌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성전을 패쇄하고, 등불도 끄고, 분향도 하지 않고,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진노하셨고, 남유다를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음을 제사장들이 직접 보아서 알고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래서 조상들이 칼에 맞아 죽고 자녀들과 아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런 맹렬한 진노를 거두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로 결심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니 제사장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주님께서 제사장들을 택하신 대로 분향하고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라고 명했다.
12-16 히스기야의 말에 레위사람들이 가문별로 나섰다. (제사장들은) 레위사람들을 모아 성결 예식을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율법에 따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 놓으면, 레위사람들이 그것들을 성 밖 기드론 골짜기로 가져다 버렸다.
17-19 성전을 성결하게 하는 일은 첫째 달 초하루에 시작하여, 첫 여드레 동안은 성전 입구를, 이어진 여드레 동안은 성전 안을 성결케 하여 첫째 달 십육일에 일을 다 마쳤다. 레위사람들이 히스기야 왕에게 성전을 성결케 한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아하스가 버린 모든 기구들을 제자리에 갔다 놓고 다시 봉헌했다고 보고했다.

>> 사관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다는 기준을 아하스 때부터 다윗이 한 모든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사관은 히스기야가 이 기준에 부합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왕이 되자마자 선왕 아하스가 폐쇄한 성전을 열고 아하스가 부수고 꺼내간 성전 기구들을 원상복귀 시켰다. 왕이 되자마자 첫해부터 성전성결을 시작했다는 것은 왕이되기 전부터 아하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히스기야가 다윗의 길을 따른 것은 모친의 영향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히스기야의 모친은 스가랴의 딸 아비야다. 모친 아비야의 아비 스가랴는 웃시야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준 그 스가랴일 것이다. (사관이 새로운 사람이 왕이 되면 몇살에 왕위에 올라 몇년을 다스렸는지와 함께 왕의 모친이 누군지 꼭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듯.)
>>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시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을 택하신 이유를 주님께 분향하고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심이라고 말한다. 다시말해 성전성결의 목적은 분향과 예배에 있다. 아달랴 때 부서진 성전을 보수하는 요아스를 묵상하면서, 23년째가 되어서야 요아스가 다시 성전보수를 재촉하여 완성한 것을 성전보수를 통해 국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딴지를 걸어보았는데, 히스기야 때는 성전성결의 목적을 분향과 예배, 곧 언약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오늘날 교회당도 마찬가지다. 화려함이 아니라 성결함을 자랑해야 한다. 기도와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어야 한다.

역대하 28:16-27 읽기

16-21 유다왕 아하스가 앗시리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사건을 사관은 기록한다. 에돔 사람이 유다를 치고 백성을 사로잡아갔고, 블레셋 사람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정착했다. 이것은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이 주님께 크게 범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인데, 앗시리아 왕은 아하스를 돕기는 커녕 유다를 곤경에 빠뜨렸다.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에서 보물을 꺼내 앗시리아 왕에게 바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22-26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어도 아하스 왕은 주님께 더욱 범죄하여 앗시리아 신들에게 제사 지냈다. 자신이 앗시리아 신들에게 제사하면 그 신들이 자신을 돕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히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 심지어 성전 기구들을 거두어서 부수고 성전을 폐쇄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이방 제단을 세우고 유다 각 성읍에도 산당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여 주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

26-27 아하스가 행한 일은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하스가 죽었으나 그를 왕실 묘지에 장사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 안에 묻었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아하스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았던 요담에 관한 기록은 27장 단 9절로 마무리 되었는데, 주의 길을 따르다 배신한 왕, 다윗의 길 대신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른 아하스의 기록은 길다. 파란만장한 일생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했다면 은혜겠지만 아하스처럼 성전을 폐쇄하기까지 갔다면 저주다. 갑자기 이력서에 한줄이라도 더 적을 것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주의 길을 따르기보다 나의 길을 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든다.
>> 바울은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했는데, 공동번역은 성경은 ‘주님 안에서 자랑’을 ‘주님을 자랑’이라고 해석한다. 곧 주님 안에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은 주님만이 되어야 한다. 이력서에 단 한 줄 쓸 것이 없어도, 주님은 우리가 행한 것을 모두 아신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특별히 자랑할 것이 없다. 그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라고 결산한다. 오히려 악하고 게으른 종이 결산할 때 말이 많다. 하나님이 어떻고, 달란트를 어떻게 했고…
>>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랑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스스로 성전을 폐쇄한 자요, 다른 사람들도 성전에 나가는 것을 막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대하 27:1-28:15 읽기

[27] 요담에 대한 기록은 27장 단 아홉절로 끝난다. 사관은 요담이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아버지와 달리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한줄평가를 한다. 6절에서는 요담은, 주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았으므로 점점 강해졌다고 사관은 적는다. 사관의 관심은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은 결과요, 그렇지 않으면 범죄한 결과라는 권선징악적 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요담 때도 남유다 백성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관의 기록을 놓쳐서는 안된다. 다윗의 나라를 다스리는 요담이라면, 강성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국방력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을 독려해 백성이 악에서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도록 가르쳐야 했다. 왕이라면 자신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28:1-7] 요담에 이어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요담은 이십오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다스렸는데, 아하스는 이십세에 왕이 되어 16을 다스렸다. 한 본문으로 읽으니 남유다의 운명이 점점 단축되는 느낌이 든다. 하여간 아하스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 아하스는 그의 조상 다윗이 한 대로 하지 않았다고 사관은 한줄평가를 한다. 드디어 기준이 ‘다윗이 한 대로’로 바뀌었다. 더 이상 선왕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사관이 깨달은 것일까? 하나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 보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느냐 아니냐로 기준이 바뀐 것이다. 사관은 아하스가 이스라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바알 신상을 만들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이방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았다고 기록한다. 요담이 웃시야 처럼 분향하지 않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하스는 아예 산당을 따로 지어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분향했다. 그결과는 하나님을 버린 선대의 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하스는 시리아에게 침공을 당했고 북이스라엘로부터도 침공을 당해 패했다. 사관은 분명하게 덧붙인다. 아하스 왕 혼자만이 아니라, 유다사람들이 조상의 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28:8-15]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은) 유다사람들을 무려 이십만명이나 사로 잡아 전리품과 함께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사마리아에 오뎃이라는 주님의 예언자가 있었다. 오뎃은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나가 하나님께서 유다에 진노하셔서 북이스라엘이 승전하게 하셨지만 살기가 등등하여 십이만이나 살육하고 이십만이나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는 것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니 형제자매된 유다 포로들을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에브라임 지도자들도 오벳의 말에 순종하여 개선하는 군대를 막아섰다. 에브라임 지도자들도 동족을 살육하고 포로로 잡아 노예삼으려고 한 일로 주님 앞에 죄인이 된 것과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개선하는 군인들에게 말했다. 군인들을 에브라임 지도자들에게 포로와 전리품을 넘겼다. 에브라임 지도자들은 전리품을 풀어 포로들중 헐벗은 이를 입히고 맨발로 걸어 온 이들을 신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상처입은 이들을 치료해 주고, 환자들은 나귀를 태워 여리고까지 데리고 가서, 친척들에게 넘겨주고 다시 사마리아로 되돌아 왔다.

>> 사관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심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