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1-16 퀵메모

// 다른 일흔[두] 사람 – 열두 제자(사도)와 다른 제자들이다. 아마도 요한이 차별하려고 했던, 예수 일행과 함께 따라 다니지 않았지만 (따라 다녔어도 함께 숙식을 하지 않았던)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어떤 사람들이 아닐까? 예수께서 일흔[두] 명을 둘씩 보내셨으니(파송하셨으니), 이들을 일흔[두] 사도라고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 주님께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 예수께서는 물리적 한계를 분명하게 지니신 완전한 사람으로 이땅에 오셨다. 승천할 기약이 가까이 오자, 예수께서는 좀 더 많은 고을과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사도로) 보내셨다.

// 일흔[두] 사도의 첫(먼저) 메세지는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였다. 이 말을 참 뜻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하여간 평화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영접하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를 하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신다. >> 한국 교회는 평화의 메세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가? 한국 교회는 평화의 메세지를 가지고 다가오는 세상에게 열려있는가? 한국 교회는 개교회 안에서만 우리끼리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 누구든지 일흔[두] 명의 말을 듣는 사람은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 단순히 보내심을 받았고 해서 사도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말이 예수의 말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인정하셨으니 일흔[두] 명은 사도가 맞다.

누가복음9:51-62 읽기

51-56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아마도 날이 저물어) 예수께서 심부름꾼들을 앞서보내 사마리아에 있는 한 마을에서 예수께서 머물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는 예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그 마을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라고 명령해도 될까요 라고 예수께 물어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런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다. 할 수 없이 예수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서 유숙하셨다.

57-62 예수 일행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수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은 집도 절도 없는 나그네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따르겠다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즉답 대신,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라고 명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고 답하셨다.

// 누가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너머에 있는 승천을 본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끝나는 게 아니다. 승천이 화룡점정이다. 예수께 승천이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아버지 집에 돌아가 영원히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의 시인이 부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라는 노래를 성도도 불러야 한다.

//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있는 사마리아 마을들도 방문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셨으나, 모든 마을에서 예수를 모시지는 않았다.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은 마을들을 (예수께서) 불로 심판하길 원했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이 심판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여러부류다. 1) 제자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은 이세상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길이라고 가르치신다. 세상 집이 아닌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2) 죽은 사람 장사를 핑계로 제자의 길을 미루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알려주신다. 하나님나라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3) 예수께서는 가족관계로 제자의 길을 미루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야 말로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고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9:37-50 읽기

37-45 다음날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다. 큰 무리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외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귀신이 제 아들을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제 아들을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예수께서는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은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 그 악한 귀신을 꾸찢으시고, 아이들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고 감탄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도 무슨 뜻인지 예수께 묻는 것을 두려워했다.

46-50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제자들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요한이 동문서답을 한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남아 있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아버지에 돌려주신 예수께서는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믿음이, 올바른 마음이 물리적인 예수와의 동행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러 오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 받은 치유와 축귀의 능력과 권능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다.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을 때, 귀신을 내쫓는 자신들의 능력/권능을 자랑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시는데, 남아 있던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놓고 다퉜던 것이다. 그러니 귀신을 내쫓을 수 없었다.

// 이런 제자들은 결국 서열 다툼을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으로 서열 논쟁을 일축하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한이 배타적인 분리 논쟁을 한다. 우리끼리는 크고 작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다른 그룹과는 다르다는 논리다. 직접 예수를 따르는 자신들이 낫다는 논리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을 막지 말라고 하신다.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 서열 매김도 하지 말고 분당질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 기도는 예수와의 동행이다.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와 물리적 동행을 못하는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누가복음 9:28-36 읽기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 때,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했다. 그들은 영광에 둘러싸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하여 말을 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를 떠나가려고 할 때, 베드로가 예수께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선생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구름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휩쌌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다. 구름 속의 소리가 끝나자, 예수만 거기 계셨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다. 길게 안보고 짧게 본다면, “여기에 서있는 사람 가운데는,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는 앞 구절의 말씀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하나님나라를 보는 사건이다.

//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다른 제자/사도들보다 편애하시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셋은 이론 교육보다 현장학습이 더 필요해서 예수께서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고 상상해 본다. 많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를 때부터 이들 셋은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에서 변화된 예수의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졸면서 눈비비면서 목격한 사건이다. 증인이 셋이나 되니 꾸며낸 사건은 아니겠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내용을 세 제자가 제대로 알아 들었을리 없다. 심지어 초막 셋을 지어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는 말도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한다. 다만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하늘의 소리는 분명했다고 기록한다.

// 산상에서 변화된 예수의 사건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는 것이요,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들어야하는, 곧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순종하는) 자들임을 가르친다.

// 누가의 이야기 전개는 ‘오병이어-제자도-산상에서의 변화’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주라’ 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드시지 않으셨지만, 굶주린 무리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이런 예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며, 제자도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산상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실 때도 (세 제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보고 들었지만) 핵심은 분명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 그러나 셋은 확실히 들었다. “너희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과 권능을 내려놓으시고 섬기는 삶을 구체화 하신다. 기도하러 올라가신 산에서 변화된 예수의 모습이다. 우리도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능력과 권능을 떠벌이지 말고 (내려놓고) 복음에 합당한 삶, 고난과 함께 하는 삶을 구체화해야 한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논의하신 것은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고난과 죽음이었다. 예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 나의 기도를 통해 변화되어야 할 나의 모습도, 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이 먼저가 아니라, 우선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이다. 기도의 자리가 곧 변화의 자리다. 기도의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자리다

누가복음 9:18-27 읽기

18-22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또) 혼자 기도하셨다.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부활했다’ 라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곧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표로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그리고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상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 라고 덧붙이셨다.

23-27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 예수께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기도였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이땅에 오셨음을 재차 확인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길 앞에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 예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다. 제자의 정체성은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제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곧 날마다 자기 정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곧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이다.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 앞에도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  

// 예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말씀을 동일시 하신다. 예수가 곧 말씀이요, 예수의 말씀이 곧 예수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야 (심판 날에) 예수께서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역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은 자기들의 본향을 찾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편지한다. 하나님께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 모든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은 결국 제자들이다. 성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