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36-50 읽기

36-40 바리새파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것을 알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예수의 발을 닦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바리새파 주인은 이것을 보고 혼자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라고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리새파 사람의 이름이 베드로의 이름과 같다. 흔한 이름이었다는 증거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시몬은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면 말씀하시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41-48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다. 돈놀이꾼은 둘의 빚을 모두 없애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돈놀이꾼을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뒤에 있는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기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49-50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누구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  사랑과 용서. 용서와 사랑.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신다. 사랑하고 용서하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아야 사랑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사랑 받아야 용서하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향유 옥합을 깨뜨린 죄인인 여자는 주님을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마치 오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는 사람처럼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용서’라고 적용했었다.  사랑은 용서다. 용서는 사랑이다. 예수께 사랑받는 것이 곧 예수께 용서를 받는 것이요, 주님께 용서 받는 것이 곧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양방향이다.)

// 이것은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랑해야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사랑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죄인인데!’ 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십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은 바리새인이 된다. 아니 스스로를 정죄하는 꼴이다. 주님은 오백 데나리온,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자를 모두 탕감해 주신다. 오십 빚을 졌다고 더 의롭다고, 오백 빚진자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며 오산이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차이도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가 아니던가.

// 나의 자리에 주님을 초대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내 편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다. 바리새인처럼 조연의 역할마저 여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초대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주님 편에 나아가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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