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12-26 읽기

12-16 그 무렵에 예수께서 산으로 떠나가셔서 기도하셨다.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았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사도로 뽑으셨다. 열둘은 다음과 같다. 시몬 베드로,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심당원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배반자가 된 가룟유다.
17-19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다. 사도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로 큰 무리를 이뤘다.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도 많은 백성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고자 몰려 들었다. 귀신 들려 고통 당하던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께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20-2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배부른 너희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웃는 너희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같이 행하였다.


// 그 무렵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을 어떻게 할까 논의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예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 예수께 기도란 무엇이었을까?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새 하나님과 함께 한 예수께서 날이 밝았을 때 하신 일이 곧 기도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가 열두 명의 사도를 뽑는 일이었고, 둘째가 변함없이 예수께 나아오는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고, 셋째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

// 사도를 뽑으셨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갈 자들을 뽑으셨다는 뜻이다. 곧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아니셨다. 사람과 똑같이 제한을 받으셨다. 예수로부터 나오는 치유와 축귀의 능력도 예수와의 물리적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우는 사람,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이 (제자들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반면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곧 지도자들은 부요함에 취해있고, 배부름에 만족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예수께 나오기는 커녕,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의논하니 하나님 나라에서 떠난 자들이라고 가르치신다.

//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라다. 가난함과 굶주림과 슬픔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핍박이 변하여,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배부르고 웃고 기뻐하고 뛰노는 나라다. 영생, 곧 임마누엘의 나라다. 예수께 나온 자들은 예수와 함께 함으로 임마누엘을 맛보기 시작한다. 한편,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삶의 목적이 나의 위안, 나의 부요, 나의 배부름, 나의 기쁨이라면, 이런 것은 오히려 화와(재앙과) 굶주림과 슬픔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영벌이다. 망하는 나라다.

누가복음 6:1-11 읽기

1-5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라고 따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윗과 일행이 주렸을 때,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제단 빵을 먹고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언하셨다.

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다.  그 회당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신 후, 그가 일어나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질문하셨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주변 사람들은 잠잠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보시고 “네 손을 내밀어라” 라고 명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 손이 회복되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화가 잔뜩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소위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촛점을 맞추시고 가르치셨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골로새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적용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하지 말라’는 교훈은 한 때 쓰다가 없어지는 것이요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것들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어서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적용한다. 예수와 안식일 논쟁을 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랐던 전형적인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사람의 규정과 교훈이 아니라, 온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는 공동체다. 예수께서 본을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착한 일, 옳은 일, 의로운 일을 해야 한다.  

누가복음 5:27-39 읽기

27-32 예수께서 걸음을 옮기셨다. 세리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레위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께 큰 잔치를 베풀었다. 많은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한 자리에 앉아서 먹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예수께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고 대답하셨다.

33-39 사람들이 예수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 군요.” 라고 비꼬았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에게, 신랑과 함게 있는 동안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날에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도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 깁는 사람은 없다. 새옷도 찢어져서 못쓰게 되고, 새옷에서 떼어낸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새 포도주가 낡은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한다.]

// 세리 레위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레위가 요한의 가르침대로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다. 다시말해 예수께서 레위를 부르신 것은, 레위가 세례받고 죄를 회개하였고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음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나라를 보여 줌으로써, 회개의 열매를 맺으시려는 것이다. 그동안 써먹었던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함께 잘 사는 나라다.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그곳에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다. 개인의 ‘의’에만 집착하던,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던 바래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도무지 적용할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것이 의와 평화와 기쁨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로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보다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의롭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다고 생각했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이런 종교적 사고를 ‘온고지신’을 모르는 ‘구관명관’이라고 지적하신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많은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선한 뜻, 곧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라고 미가 선지자는 선포했다.

// 새 포도주라고 성분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전통과 관습이라는 낡은 부대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부대로 읽어내야 한다.

누가복음 5:12-26 읽기

12-16 예수께서 어떤 동네에서 온 몸에 나병이 든 사람을 고치셨다. 온 몸에 나병이 든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려 간청하였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예수께서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 더 퍼지니, 큰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17-26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데, 갈릴리와 유대 각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병을 고치심으로 주님의 능력이 함께시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 때,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께 데려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천정을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무리 가운데 계신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의하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죄가 용서받았다’ 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 쉽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너나서 침상을 치워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거두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갔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두려움에 차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나병환자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여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깨끗해짐이 개인적인 사건일 수 있어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구원이 시작되어도,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구원에서 머물기 원하는 것 같다. 내가 깨끗해지고 내가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교사들, 율법학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나라를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셨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는 나병환자의 개인적인 믿음과 달리 그들의 믿음을 본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중풍병자 한 명이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셨다. 예수님은 율법학자/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죄가 용서받는 것으로 적용하셨다. 예수께서 이땅에 병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오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용서를 선언하신 것은 분명 죄의 용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서는 것이 유대 공동체가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이 강한 자들이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것,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가 서는 길이었고, 곧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서는 길이다.

// ‘나’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침상에 누워지내던 중풍병자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갔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신기한 일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로 주님 앞에 나오지만, 주님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게) 교회라는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다.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야 말로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신기한 일이어야 한다.

누가복음 5:1-11 읽기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계실 때, 무리가 예수께 말씀을 듣기 위해 밀려왔다. 마침 배 두척이 호숫가에 배를 대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두 배중 시몬의 배에 올라,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신 (가르치심을 마친) 후, 시몬에게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밤새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즉시 마음을 바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다고 순종했다. 시몬이 예수의 말씀 그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불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가득히 채우니 두 배 모두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와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 특별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배를 뭍에 댄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셨기에,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은 예수의 가르침을 귀동냥했을 것이다. 귀동냥이었서도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도 예수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는 명령에 즉시 마음을 바꿔 순종했다. 그리고 두배를 가득채우고도 배가 가자앉을 지경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자 시몬은 예수를 주로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사건이 먼저다. 그리고 온갖 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이 시몬 장모의 집에서 고침을 받았고 축귀를 받았다. 그렇다면 시몬이 예수를 모를 수 없다. 주변의 수많은 간증거리가 시몬을 바꿀 수 없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시몬은 형제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시몬에게 예수는 선생님 이상은 아니었다.

// 그런데 예수께서 시몬의 삶을 만지셨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자란 베드로의 전문 영역에 예수님이 도전?하신 것이다. 시몬은 창조주이신 예수께 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물고기를 보고 시몬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다. 피곤에 지쳐 예수의 도전에 ‘아침에, 그것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래도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한 번은 선생님의 말을 들어줘야지’ 라는 마음은 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주인과 종의 관계요, 그것도 불충한 종, 죄인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시몬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용서하셨다. 용서받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 베드로가 엎드려서 예수께 말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번역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주님, 나에게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죄인임을 자백합니다.” 좀 더 고친다면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어떤 판결(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가 낫지 않을까? (헬라어를 모르니ㅠㅠ) 베드로는 죄가 있으니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용서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도 요한은 첫번째 편지에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정리한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