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31-44 읽기

31-37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던 회당에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예수께 왜 우리를 간섭하냐고 외쳤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는지 물었다. 악한 귀신의 영도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악한 귀신의 영에게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를 사람들 가운데 상처 없이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지? 예수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소문이 근처 모든 곳에 퍼졌다.

38-41 예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낫게 해달라고) 청했다.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셧다. 그러자 열병이 물러가고,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서 예수와 예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시중을 들었다. 해질 때에 사람들이 온갖 병으로 앓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을 안수하고 고쳐주셨다. 귀신들도 내쫓으셨다. 귀신들은 예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꾸짖으셨다.

42-44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무리가 예수를 찾아, 마을을 떠나지 마시고 머무시길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유대의 여러 회다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 고향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니 살기등등한 고향사람들을 떠나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오셨다. 23절에 의하면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이적을 행하신 곳이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말씀을 가르침’과 ‘축귀’와 ‘치유’로 나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라고 정리한다.

//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러나 가버나움 사람들의 놀람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이상히 여긴) 것과 달랐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가르침, 곧 말씀의 권위는 뒷전으로 밀리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선생이 되었다는 것에 더 놀랐을 것이다. 오늘날도 말씀 자체의 권위는 뒤로 밀리고 설교자의 스펙에 미혹되는 일이 많으니 정말 놀랄 (경악할) 일이 아닌가?  

// 예수께서는 배척 받은 나사렛을 떠나셨기에 환대? 받은 가버나움에 머무실 법도 했다. 그러나 외딴 곳으로 가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던) 예수는, 자신을 찾은 무리들에게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라고 말씀하시고, 유대 여러 회당에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음~ 하나님 나라는 추앙받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리의 뜻대로 예수께서 추앙을 받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누가복음 4:14-30 읽기

14-15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졌다.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16-21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건네 받아 다음 구절을 찾아 읽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이 회중이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22-30 예수의 말씀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말씀만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 소문대로 선생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에도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이적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아합 때 삼년 육개월 가뭄 동안 이스라엘에도 가난한 과부들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과,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침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의 지적에 모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에 있는 구절을 읽으신 예수께서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예수를 주목했다. 소문에서 듣던 이적을 기대했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이 오늘 예수께 이루어졌다고 짧게 봉독한 말씀을 적용했다. 예수의 말씀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과연 소문대로 예수의 가르침은 은혜롭고 놀랐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선생이 되어 돌아오다니.  은혜와 놀람은 잠깐이고 회중들은 또다시 소문대로 어떤 이적을 행할 지 예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회중은말씀대로, 예수께 주님의 영이 내리시고, 주님께서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고, 주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눈먼자에게 눈뜸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기대했다. 몇번을 들었을 성경두루마리나 펴서 짧은 구절을 읽은 요셉의 아들을 예언자로 모실 이유는 없었다. 예수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저 자기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이적을 행하는 ‘종’이면 모를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만난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던 점을 치는 여종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무한한 구원의 은혜를 버리고,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는…)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로 자신이 예언자이심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가난한 중에도 예언자를 섬긴 사렙다 과부와, 부한 중에도 예언자를 찾았던 이방인 나아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고향이 아니어도, 심지어 이방에서도 예언자를 환영하고 존중하는 곳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회중은 돌변했다. 예수께 고향을 떠나려면 떠나라고 밀어부쳤다. 아니 정말로 예수를 회당에서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어부쳤다. 그러나 예수는 회중들 한 가운데를 지나 자리를 피하셨다. 환영받지 못하면 떠나셨다.

>> 주님은 나의 주인으로 환영받기를 원하신다. 행운을 가져다 주고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이 아니시다. 주님을 내 편으로 삼지 말고, 내가 주님 편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4:1-13 읽기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그곳에서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사십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40일이 다하였을 때는 굶주리셨다. 악마가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가서 세계 모든 나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예수께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했다. 악마는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넘겨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악마는 예수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고 대답했다.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했다. 악마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천사들이 너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라고 대답하였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갔다. 악마는 정해진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 성령으로 가득하여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만 인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광야로도 이끈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받으시면서 가득했던 성령을 다 소진했다고 상상해 보았다. 금식으로 육신만 굶주리신 것이 아니다.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시면서 성령에 이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신 것이다. (금식은 나를 비우는 것이다. 나를 비운다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받아야 하는 것이다. 피동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육신이 굶주린 상황에서도, 성령이 고갈된 상황에서도 악마의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악마가 모든 시험으로 예수께 성령이 공급되지 않도록 방해 공작을 폈지만, 말씀이신 예수께 말씀은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의 시험으로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없을 때 성도를 지켜주는 것도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된다.

//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곧 말씀이 있는 곳에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방법은 결국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것이다. (결국 악마의 모든 시험으로 예수께 충만했던 성령이 다 소진했다는 나의 상상은 말씀이신 예수께는 해당되지 않는다.)

// 예수께서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양식으로 삼으셨고, 예수께서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만을 자기 주인으로 모셨고, 예수께서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다. 내 안에 거하는 말씀도 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악마가 있다면 내 안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결국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는 수 밖에 없다. 악마가 나의 마음에 또아리를 틀지 못하도록. 

누가복음 3:15-38 읽기

15-17 당시 유대 백성은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다. 모든 백성은 마음속으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은)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곧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나보다 더 능력있는 분은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손에 키를 들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셔서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실것입니다.”
18-20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고)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요한은 기쁜 소식만 전한 것이 아니라 분봉왕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한 일과 헤롯이 행한 다른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였다. (헤롯은 자신을 책망한 요한을 나중에 옥에 가둔다.)
21-22 요한에게 나온 백성들은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울렸다.
23-38 예수께서 서른 살쯤 되셨을 때, 활동을 시작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누가는 요셉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윗 >> 유다 > 야곱 > 이삭 > 아브라함 >> 노아 >> 셋 >> 아담에게 이르는 족보를 기록한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힌다. 자신은 더 없이 높으신 분, 자신 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라고. 마태는 유대 광야에서 세례 요한의 첫 외침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기록했다. 예수께서도 같은 말씀을 전파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사역을 보면 요한은 회개로 이끄는 일에, 예수께서는 천국을 가르치시는 일에 더 집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한은 이것을 자신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불세례로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 자신의 물세례는 죄씻음의 시작에 불과하고 예수의 성령/불세례를 받는 것은 온전히 죄사함을 받고 곳간에 들여지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시작이 반이어도 완결은 아닌 것이다. (요한은 죄를 지적하고 예수는 죄를 용서한다…)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라는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하면 사실 다른 증거는 필요없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는 (아들인) 너를 좋아한다’ 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개역개정의 ‘기뻐한다’를 새번역에서 굳이 ‘좋아한다’로 번역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창세기 1장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연상된다. 마찬가지로 성도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 의사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요셉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보조증명한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함을 복음의 눈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족보에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내는 쭉정이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 그렇게 사셨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도 평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누가복음 3:1-14 읽기

1-2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통치할 때,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릴 때, 헤롯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릴 때,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실 때,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니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
3-6 (하나님이 말씀을 받은)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다니며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누가는 요한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있는 대로 였다고 전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하여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7-9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마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10-14 요한의 말을 들은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속옷을 두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은 세리들에게는”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라고 대답했다.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라고 대답했다.

// 하나님의 말씀은 황제에게도 아니고 총독에게도 아니고 세 분봉왕에게도 아니고, 심지어 두 대제사장에게도 아니고, 광야생활을 하면서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준비하던 요한에게 임했다. 그 말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있는 말씀이었다. 요한은 그 말씀을 온 지역을 다니며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먼저 적용했다. //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세례가 죄사함의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역이라고 가르친다. 죄사함으로 진노를 피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외적 증거인)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독설을 내뿜는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 곧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씀이 거하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 세례 받으러 나온 사람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씀이 거하냐고) 물었다. 요한은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과 나누어서 더불어 살라고 가르쳤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받지 말라고 적용했고, 군인들에게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적용했다. ‘더 받지 말고 만족하라.’ ‘나누어 주고, 더 받지 말고 만족하는 것’이 더불어 사는, 곧 회개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의 기본 원리라고 적용한다.

// 시편 41편 1-3 묵상 일부를 다시 소환한다. [시인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보살피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돌보다/보살피다’ 라는 단어는 출애굽기에 세번 나오는데, 세 번 모두 ‘배상’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시말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배상의 성격이 강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였을 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를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삭개오 집에 이르렀다고 축복하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닌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공동체다움을, 사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20/12/28)]

>> 나누어 주라. 더 받지 말라. 만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