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1-10 읽기

1-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라]

5-6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주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7-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종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 작은 사람들을 실족 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실족과 용서를 연결시킨다. 작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를 받으러 나오는데 용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일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돌보지 않은 비유가 떠오른다. 용서는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특별히 작은 자,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들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 용서라고 하시는데, 심지어 착취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ㅠㅠ

//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아마도 일흔번 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주께서는 믿음의 크기, 믿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무가 중요하다고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있다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냐고 하시는 것 같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을 빚을 탕감받은 종의 행실로 풀어낸다. 종은 주인이 명령한 대로 행하는 존재다. 종이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행하였다고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은 할지언정) 종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주인의 입장에선 무익한 종이다. ‘무익한/ 쓸데 없는’ 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25장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다. 그러니 10절 하반절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종의 고백은 ‘우리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받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어야 마땅한 그 무익한 종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빚을 탕감 받았으니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결초보은)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용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도 용서다. 성도는 일만 달라트 용서 받은 자다. 그러니 누구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도에게 이미 주신 ‘그’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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