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11-32 읽기

11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두 아들’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12-24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살림을 나눠 받은 작 아들은 제것을 다 챙겨 먼 지방으로 갔다. 거기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작은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는 아주 궁핍해졌다. 결국 돼지치는 사람을 찾아가 돼지치기가 되었다. 그는 돼지가 먹는 꿀꿀이 죽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작은 아들은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집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굻어죽게 되었다고 혼자 읊조렸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시인하고 아들의 자격은 이미 상실했으니 품꾼의 하나로라도 삼아 달라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가 고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집과는 아직 먼 거리였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어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라도 삼아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작은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잔치를 벌여 마땅하다고 말했다.]

25-32 큰 아들 [큰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잔치소리가 들렸다. 큰 아들은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종은 큰 아들에게 동생이 돌아왔고, 건강하게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주인 어른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대답했다. 큰 아들은 화가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마리 주신 일이 있었느냐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동생이 오니깐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구요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것이다. 그런데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라고 말했다.]

//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 누구에게 촛점을 맞춰야 할까? 잃었다 찾은 양과 드라크마 이야기의 연장선이라고 우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아버지는 선한 목자요, 드라크마 주인이다. 작은 아들은 잃었다 찾은 양이고 드라크마다. 큰 아들은 들에 그냥 둔 아흔아홉마리 양일 수도,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일 수도 있겠다.

// 예수께서는 잃었다 되찾았다는 것을 죽었다가 살아났다로 풀어낸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은 산 것이요, 아버지를 떠난 것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 곧 임마누엘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 아님을 교훈한다. 큰 아들은 늘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누리지 못했다. 잃은 것을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작은 아들에게 임마누엘은, 작은 아들이 굶주림 속에서 아버지 집을 떠올릴 때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품에 다시 안기기까지는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시편 84편 시인의 노래를 이미 불렀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문지기라도, 아니 품꾼의 하나로 만족한다고 노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로 반겨주신다.

누가복음 15:1-10 읽기

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2-7 예수께서 투덜거리는 그들에게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한마리를 잃어버리면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닐 것이다.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잃어던 ‘내 양’을 찾았다고,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8-10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다.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는 등불을 켜고 온집안을 쓰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질 것이다.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사람을 불러 모으고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잔치에 초청 받지는 못했지만 잔치소식을 들은 각설이들은 잔치하는 동네에 모여들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없다고 하자, 화가 나 잔치 주인은 종에게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각설이들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이 각설이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리와 죄인들은 (마음이, 혹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요, (율법에 대하여) 눈먼 사람들이요, (율법을 지키는 것에) 다리 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의 (예수의) 초청에 응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초대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잔치를 맛보지 못헸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초대만 받고) 행하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예수의 관심은 의인이냐 죄인이냐, 아흔아홉이냐 하나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은 없다. 우리끼리 크니 작니 아웅다웅 거려봐야 거기서 거기다. 4-6절에서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찾아낸즉 > 찾아내었노라.” 라고 찾는다 라는 동사가 반복된다. 길을 잃은 양이 목자를 찾고 찾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찾는다. 결국은 선한 목자의 소유된 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주인이 벗과 이웃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 예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셨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맞아 들이라. 우리 주님은 (지금도)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누가복음 14:25-35 읽기

25-33 (여전히)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집을 지으려고 하면 집질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 먼저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셈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전쟁에 나가려면 적군과 싸워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4-35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찐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거름으로도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예수를 따라 다닌다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1) 가족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그런데 이 제자는 자격증을 따듯 일회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한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이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려지듯이, 제자의 자격을 잃으면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버려진다. 밟힌다.


// 사람들은 망대를 세우기 전 그 비용을 먼저 셈한다. 셈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물론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 그래도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함으로’ 예수의 제자인 것을 보여주지 못하니. 그러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00년이 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진척이 있기 때문이다.

// 싸움의 결과를 헤아려 보는 것과 같이 자기 소유을 다 버리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과 싸워 결국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던가. 설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망하게 하실까?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의 거짓 예언에 사로잡혀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보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더 우상시 한 결과였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무조건 교회가 이기도록 하시지 않는다. ‘교회다움’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이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예루살렘과 성전까지도 망하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교회도 철저히 망하게 하실 분이시다. 한국교회는 3세기 이전의 로마교회로부터 ‘약자의 신학’을 배워야 한다. 지금은 망할 때다.


// 소금은 좋은 것이다. 좋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와 같은 뜻이리라. 따라서 제자의 소금됨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이다. 그러나 제자의 삶을 보여주기 못하면 더이상 제자가 아니다. 제자의 삶을 잃은 제자는 쓸 데가 없어서 하나님 나라 밖에 내버려진다. 성전, 거룩한 성, 곧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성도라면 이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누가복음 14:15-24 읽기

15 함께 먹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 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예수께서는 다음의 비유를 덧붙이셨다.
16-23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잔치 날이 되 그는 종을 보내어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니 손님들을 모셔오라고 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고 참석할 수 없다고 종들만 돌려 보냈다. 밭은 사고, 소도 사고, 결혼도 하고… 종은 돌아와서 주인에게 손님들이 함께 오지 못한 이유를 보고했다. 그러자 집주인이 화가나서, 종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을 데려 오라고 명령했다. 종은 주인의 명대로 행하였지만 아직도 잔치자리가 남았다고 주인에게 보고했다. 주인이 종에게, 큰 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잔치집을 채우라고 명했다.]
24 예수께서는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신다.

//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을 알면 뭘하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집에 하나님을 초대하려고 했지,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서 초대하는 자리에 나아 오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도 만족하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잔치 소식은 알고 있어지만, 초대받지 못해 잔치집을 기웃거리는 가난한 사람, 지체 장애인, 눈면 사람, 다리 저는 사람들이 초대된다. 그래도 빈자리가 있자 하나님의 잔치에 대한 소문조차 듣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로 잔치집을 채우신다.


// 초대를 받은 사람들. 말씀을 듣기만 한 자들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대에 핑계없이 응하는 사람들이다. 내 편에 하나님을 모시려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 내가 나아가야 한다. 나의 잔치에 (먹고 마시고 팔고 사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나님을 모시려 들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석해야 한다.

누가복음 14:1-14 읽기

1-6 어느 안식일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에게 식사초청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주목했다.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율법교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잠잠했다. 예수께서 그 병자의 손을 잡아서 고쳐주시고 그를 돌려보냈다. 예수께서 주위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도 누구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당장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없었다.

7-11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네가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혹시 손님가운데 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그를 초대한 사람이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시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된다. 초대를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그리하면 너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친구여 , 윗자리로 올라 앉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너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12-14 예수께서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누가는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식사하는 장면을 자주 기록한다. 그만큼 말씀을 맡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기회만 있으면 저들의 초청에 응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다고 하신다. 합법적이라고 하신다. 곧 율법의 정신에 부합된다고 하신다. 바리새파 사람들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자신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 초청을 받거든 가서 맨 끝자리에 앉아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친구여, 윗잘리로 올라 앉으시오’하고 말할 것이라고,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니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 라는 노래가 절로 나올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상석이 따로 없다. 주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친히 시중들어 주시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자리가 상석이다.

//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은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라고 하신다. 이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다. 구제가 곧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12장에서 적용했었는데, 성도가 베풀어야 할 잔치도 구제와 연결된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불러 놓고 자기 상을 이미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 수종병 환자처럼, 향유 옥합을 깬 여자처럼, 바리새파 식탁에는 가난하거나 사회적 약자들이 식탁의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을려고 나아왔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이들을 맞아 주셨다. 교회가 본받아야 할 역할이요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