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22-35 읽기

22-30 (승천이 가깝자) 예수께서는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리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때 너희가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이 우리를 길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고 말해봤자, 주인이 너희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깨닫게 될 것이요, 그때에 너희는 바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다.]

31-35 바로 그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여기에서 떠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헤롯 왕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다고 (핑계를) 말했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말했다.[“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고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길을 가야겠다. 예언자가 예루사랄메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 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로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 할 그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이 좁다고 하신다. 문에 장애물이 많아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다. 더군다나 좁은문이 닫힐 것이라고 하신다. 문이 닫히면 문을 두드려도, 졸라도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건만 구원의 문은 그렇지 않다. 구원의 문은 내가 두드린다고 열리는 문이 아니라고 하신다. 요한은 라오디게야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으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환상을 본다. 구원의 문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두드려서 열리는 문이 아니라, 주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내가 열어야 하는 문이다. 그렇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집주인이 문을 닫기 전에 유효하다. 곧 심판주 앞에 가기전에 주와 화해하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함을 뜻한다. 주와 화해하지 않고 불의를 일삼으면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소용없다.

//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나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하신다. 주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열고 주와 화해하는 사람들이 육적 이스라엘 말고도 많다고 하신다. 하나님 앞에 선민이라고, 큰 자라고 자부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작은자라도 주의 음성을 듣고 주와 화해하는 문을 열고 주께로 들어가 주와 더불어 먹고 주께서 나와 더불어 먹는 자들이 큰 자가 된다.

//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얄미운 존재다. 그래서 예수를 떠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께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했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시인하지 않았다. 심지어 헤롯에게 핑계를 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싸워야 할 선한 싸움, 달려갈 길이 있음을 아셨다. 장애물이 많은 좁은 문을 여시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자신의 길을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바울도 이런 예수를 본받아 예루살렘으로 향했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주께서는 여전히 화해의 문을 두드리신다. 주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를 볼 수 없다.

누가복음 10:10-21 읽기

10-17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여 앓으며 곱추?인 한 여자가 (회당에) 있었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 여자에게 안수하셨다. 그 여자가 굽었던 곳을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보고 일할 날이 엿새나 있는데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분을 내었다. 주께서 회당장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소와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야?” 라고 반문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반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다른 회중들은 예수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

18-21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을 다음과 비교하셨다. 1)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 귀신들여 앓으며 곱추?인 여인을 고쳐주셨다. 회당장은 안식일 규례를 어겼다고 화를 냈다. 회당장은 18년동안 앓고 있는 여인이라면, 응급환자도 아니고, 하루 더 기다렸다가 주중에  고쳐도 되는데 굳이 안식일에 고치냐고 따졌다. 예수께서는 응급환자냐 장기입원환자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소와 나귀에게 물이 필요하면 안식일에도 고삐를 풀어 물을 먹이듯, 사탄에 매여 생수가 필요하면 사탄이 붙잡고 있는 매임을 풀어 생수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다. 승천할 때가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한시가 급하셨다. 무화과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일을 한번이라도 더하신다. 당연히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따지는 것보다 생명이 중요하다. 회당장도 자신이 화를 낸 것을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회중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자 기뻐했다.

// 하나님 나라는 왔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요 누룩이라고 하신다. 지금은 그 실체가 작아 존재조차 의심할 수 있으나, 겨자씨가 자라면 큰 나무가 되듯, 누룩이 온 반죽을 푸풀리듯 분명해 질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으로부터 안식할 곳이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향해 소금과 빛인 곳이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3:1-9 읽기

1-5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예수의 귀에 들어왔다. 예수께서는 그 소식을 전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9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 무화과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찾지 못했다.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했다. 열매도 없는 나무로 땅만 버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포도원주인에게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손에 망할 수도 있고, 사고로 (천재든 인재든) 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해서 찍어 버려짐을 당해 망할 수도 있다. 사람의 손에 망하든, 사고로 망하든 그후에 받을 심판의 결과를 우리는 모른다. (세상에서 망하는 것을 죄때문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해서 찍어 버려짐을 당하는 것은 죽은 후 받을 심판의 결과, 곧 영벌이다. 이것은 분명 죄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사람이든 사고든)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고 말씀하셨다.

// 그렇다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포도원지기로 오셨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왜?) 무화과나무라도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다. 요한복음에서 에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포도원지기가 무화과 나무에 주는 거름은 믿음이다.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순종하는 경험의 축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라고 하신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어제 말씀처럼 심판의 자리에 가기 전에,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과 화해하면 된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망한다.

어제 묵상을 조금 끌어다 쓴다.

//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에게 ‘의’가 무엇인지 알라고 하신다. 의는 심판의 자리에 가기 전에, 모든 사람을 심판의 자리에 세우는 주님과 미리 화해하는 것이다.  주님과 화해해서 심판의 자리를 면하라고 하신다. 재판을 받게되면 무조건 유죄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바울은 적용한다. 사람이 어찌 스스로 자신의 죄값을 다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

누가복음 12:49-59 읽기

49-5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에다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겟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고부간이 서로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54-59 예수께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관원에게로 가게 되거든, 너는 도중에 그에게서 풀려나도록 힘써라. 그렇지않으면 재판받고, 형무소에 들어가고 결국 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불은 심판이다. 이미 심판이 이루어 졌으면 예수께서 바랄 것, 곧 기도해야 할 것이 더 없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게서는 받아야 할 세례, 곧 대속의 십자가를 앞두고 있다. 십자가의 대속까지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실 것이다. 개인적으로 유대인들의 배척보다 세상 죄를 져야하는 부담이 예수 앞에 놓인 괴로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은 가족끼리라도 알곡과 가라지로 나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 평화는 없다. 분명하게 쪼개진다. 구분된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으로부터 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 사이는 철저하게 나뉘어 진다. 쪼개 진다. 구별된다고 말씀하신다.

// 예수께서는 위선자들에게 ‘의’가 무엇인지 알라고 하신다. 의는 심판의 자리에 가기 전에, 모든 사람을 심판의 자리에 세우는 주님과 미리 화해하는 것이다.  주님과 화해해서 심판의 자리를 면하라고 하신다. 재판을 받게되면 무조건 유죄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바울은 적용한다. 사람이 어찌 스스로 자신의 죄값을 다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

// 화평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행복과 마찬가지다. 누리는 것이다. 즉 동사형이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시지 않았다. 세상과 화평/하/려/고/ 오셨다. 심판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려고 오셨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과 화해하는 수 밖에 달리 없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의’라고 하신다.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것이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2:35-48 읽기

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르릴 때에, 곧 영러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종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이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너희는 이것을 알아라. 집주인이 언제 도둑이 들지 알았더라면, 그는 도둑이 그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41-48 베드로가 예수님께, 비유가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인지,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물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슬기로운 청지기는 어떻게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의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으면 그가 예상하지 않은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주인이 와서, 그 종을 몹시 때리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도 않는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고 매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

// 그 종(들)은 복이 있다!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복이 있다. 주인이 맡긴 일을 시킨대로 하고 있는 신실한 종이 복이 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준비하는 것이요 등불을 켜 놓고 있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미 보여 주신 길이다. 제자의 길이다.

// 신실한 종의 수종을 받은 주인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수종을 받는 신실한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다. 시편 23편5절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나 미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날 전 날 만찬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드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조건을 다셨음에도 미리 친구라 불러주시지 않으셨던가 (요15).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다. 조건이 아니라 은혜다. 미래 일이 아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 준비하는 자, 순종하는 자에게는 조건이 더이상 조건이 아니라 의무/권리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 아니라 권세가 된다.) 슬기로운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