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1-13 읽기

1-4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5-13 기도할 내용을 가르쳐 주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졸라대라고 가르치신다. 구하는 너희에게 주실 것이고, 찾는 너희가 찾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는 너희에게 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하는 사람이 받고 찾는 사람이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생선대신 뱀을 주지 않듯이, 달걀대신 전갈을 주지 않듯이, 악인이라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들을 주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졸라대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신다.

// 기도의 내용 I –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곧 효도 하는 것이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아버지이시다. 2)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곧 우리 왕이시다.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이상을 구하지 않는다.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배가 고프면 도둑질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4)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길이다. 5)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잣대다. 6)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게, 혹은 두 마음을 품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다.

// 기도의 내용 II – 이 기도는 개인적인 기도라기 보다 다분히 공동체적 기도다.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도, 하나님나라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공동체가 받아야 한다. 나만을 위해 필요한 양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하고, 개인적인 죄만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의 죄까지 자백하고 용서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빚진 모든 사람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원수들까지 용서해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기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도록, 또 두 마음을 품지 (진리도 붙잡고 세상가치관도 따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 기도의 방법 – 친구보다 더 가까운 아버지께 졸라대라고 하신다. 그런데 나의 필요가 아니라 방문자의 필요를 위해 졸라대라고 하신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한 빵이 아니라 객의 배를 채우기 위한 빵을 위해 졸라대라고 하신다. 기도의 내용에도 기도의 방법에도 ‘나’를 위한 기도는 없다.

// 기도의 결과 – 아버지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내가 졸라대는 것보다 더 좋은, 아니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내가 졸라대는 것을 안주신다고 계속 졸라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동체 이웃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실 때까지 졸라대야 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누가복음 10:25-42 읽기

25-28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반문하셨다. 그 율법교사가 율법에 이르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네 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답변하셨다.

29-37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그 사람을 잘 볼봐 달라고 부탁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는지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셨다. 그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명하셨다.

38-42 예수 일행은 어떤 마을로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마리아 보고 자신을 거들어 주라고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다.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 영생! 율법은 영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아는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칭찬에? 율법교사는 자신이 예수를 시험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는 지 보이기 위해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 사람 같이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다.

// 영생을 주제로 한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에서 다시한번 예수의 평지설교, 곧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6:27-36 )떠올려 본다. 율법교사는, 죄인들도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사람이요,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좋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사마리아 인은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주는 자로 등장한다. 원수지간인 유대인을 측은히 여긴 사마리아 인을, 율법교사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한다. 예수께서 평지설교에서 말씀하신 대로 ‘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을 실천한 전형으로 등장한다.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신 그대로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영생이다.

// 율법교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정작 몰랐다. 율법교사는 알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는 만큼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율법교사가 사랑의 대상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로 제한하고 있었기에, 예수께서는 원수에게도 이웃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내’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 마르다와 마리아 –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르다는 주님을/주님의 일행을 접대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에 반하여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일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신다. 미가 선지자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게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염려하며 들뜬 사람에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게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예언했다. 핵심은 예수와 함께 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섬길지 염려하고 들뜨는 것보다, 차분히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복음 10:17-24 읽기

17-20 일흔[두] 사람이 (사도가)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일흔[두] 사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22 일흔[두] 사도의 보고를 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다음과 같이 성부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23-24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 칠십[이]인의 기쁨 – 예수께 돌아 온, 칠십[이]인 사도들은 귀신들까지도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했다. 물론 주님의 이름을 대면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들 칠십[이]인은 요한이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9:49)라고 말했다가 예수께 책망을 들었을 때, 요한이 지칭한 어떤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 더 큰 기쁨 – 예수께서는 귀신들까지도 칠십[이]인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칠십[이]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귀신들까지 내게 복종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 예수의 기쁨 – 예수의 기쁨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다.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성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삼위하나님의 교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곧 아버지 하나님께 아신바 된 사람들로 (특별히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칠십[이]인의 사도들과 이들의 복음을 받아들인 곳곳의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다.)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그러나

// 기쁨 중의 기쁨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보는 너희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많은 예언자들도, 왕들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삼위 하나님이 교제를 보고 들으니 복되다고 하신 것이다. 성도가 삼위하나님의 사귐(교제)에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기쁨 중의 기쁨이요, 가장 큰 복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