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9-40 읽기

19-26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겨냥하여 앞의 비유를 말씀하신 줄 알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백성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잡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정탐꾼들을 예수께 보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했다. 종교법으로 어떻게 못하자 사법권에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의로운 사람들인 체 행세하면서 예수께 접근한 정탐꾼들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입발린 소리를 먼저 했다. 그리고 예수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옳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의 속셈을 아신 예수는 데나리온 한 닢을 보여 달라고 하신 후, 데나리온에 누구의 얼굴과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황제의 얼굴상과 황제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답변에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27-38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몇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일곱형제 맏이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어, 둘째가 형수를 맞아들였고, 둘째도 자식이 없어 죽어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다. 이렇게 일곱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나중에 이 여자도 죽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이 있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지 물으며,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변호했다. 예수께서는 이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다고 답하신다.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고 하신다. 부활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신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신다. 모세가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하고 부르는 것이 증거하고 하신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 아니시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고 하신다.

39-40 예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들 몇 사람은 예수께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쳤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감히 예수께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 마치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이분법으로 나뉘는 듯한 뉘앙스다. 그러나 이 아침에는 황제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적용해 본다. 황제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가이사의 형상과 이름이 있는 동전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가이사의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로마서 13:1-7은 어쩌면 이 말씀에 대한 바울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세상 황제보다 크신 분이시다. 가이사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글 (말씀)을 받았다는 이스라엘은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않다고 우회적으로 꾸짖으신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 부활! 미래의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이삭의 하나님 이셨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것이 아니라, 모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하나님이시고, 스데반을 비롯한 집사들의 하나님이시고, 믿음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시다. 부활은 신비하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예수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여전히 삼위 하나님으로 교제하시는 근거다. 부활은 완전한 임마누엘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부활신앙은 결국 온전한 임마누엘을 꿈꾸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영생이요 하나님을 모른다면 영벌이다.

//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도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맛볼 수 있다.

누가복음 20:1-18 읽기

1-8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던 어느 날, 기쁜 소식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따졌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났다고 말하면 요한을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고 답하셨다.

9-18 예수께서 백성에게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났다. 포도를 거둘 때가 되어서 포도원 주인은 종 하나를 보내 포도원 소출 가운데서 얼마를 소작료로 받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른 종을 보냈다. 농부들은 그 종도 때리고 모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은 이 종에게도 상처를 입혀서 내쫓았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주인은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했다.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버리면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서 죽였다. 이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라는 기록된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종교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지 물었다. 예수는 즉답 대신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났는지 반문했다. 다시 말해 요한이 무슨 권한으로 백성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그들에게 되물은 것이다. 요한의 세례를 하늘에서 난 것이라고 인정하면, 예수의 권한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지도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도 무슨 권한으로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주인 아들의 권한으로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곧 자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음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나라의 머릿돌이라고 덧붙이신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고 성도가 성전을 짓는 건축주는 아니다. 성도는 건축가가 (집을 짓는 사람들이) 될 수는 있어도, 건축주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건축주 하나님은 아들, 곧 성자 예수를 거룩한 성의 (하나님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성도는 교회의 지체요,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마태는 집을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은 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눈에는 집을 짓는 것은 건축가들이 하는 것 같지만, 집은 건축주의 설계대로 지어진다.

// 종교 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할 성도의 일원이다. 교회의 건축주는 하나님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교회에 속한 성도는 직분을 떠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되는 권세가 아니다!

누가복음 19:28-48 읽기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심을 반복적으로 상기 시킨다. 예수께서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이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 두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가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두 제자가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들이 그들에게 그 새끼 나귀를 왜 푸는지 물었다. 두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두 제자가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나귀 등에 걸쳐 얹고서 예수를 태웠다. 예수께서 탄 나귀가 진행할 때,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의 내리막 길에 이르셨을 때,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무리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도착하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의 예수를 알았으면 좋을 터인데, 그 일을 보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자녀들이 짓밟히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를 없애려고 논의했으나 방도를 찾지 못했다. 백성들이 예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이다.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정리한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입성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평화의 마을이 그 속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평화의 왕을 기대하지 않고, 병거를 타고 입성하는 개선장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육적) 평화의 마을이 함락되고, 그 중심에 있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더 슬프셨을 것이다.

//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제일 먼저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장사는 주인이 없을 때 하는 것이요, 주인이 있을 때는 주인과 함께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것이 종들이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물론 주인이 없을 때라도 종은 정의와 공의로 장사를 해야 하지만. 하여간 예수는 성전에 하나님을 주인을 모시지 않음에 진노하셨다. 평화의 마을에, 그것도 평화의 왕을 모셔야 하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다.

// 성전을 회복하는 길은 결국 말씀을 가르치는 것 밖에 없다.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가깝지만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백성들은 모두 예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지만, 오히려 장사의 잇권을 빼앗긴 종교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예수를 없앨 계획을 세웠다. 평화의 마을에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9:11-27 읽기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다음의 비유를 덧붙이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바로잡고 싶으셨을 것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 종 열 명을 불러 한 므나씩 주고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명령하고 떠났다. 사실 시민들은 그 귀족을 미워해서, 먼 나라로 사절을 보내, 그 귀족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그러나 먼 나라 황제는 그 귀족에게 왕위를 주었고,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다. 첫째 종은 주인이 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다고 결산했다. 주인은 첫째 종에게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다고 칭찬하고,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둘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벌었다고 결산했다. 주인은 둘째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또 다른 한 종은 주인이 주고간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다가 가져왔다고 결산했다. 그 종은 깐깐한 주인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덧붙였다. 주인은 그 종을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며, 종이 말한대로 깐깐하게 심판했다. 그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명했다. 종들은 주인에게, 첫째 종은 이미 열 므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왕이 된 귀족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사절을 보낸 원수들을 끌어내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처럼 사용하신다고 적용했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혼돈스러워 한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언제와 어느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셨음에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한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나라다. 종들이 공평하게 대접받는 나라다. 능력과 상관없이 한 므나씩 받는 나라다. 차별이 없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원치 않는 세상나라와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가 다스리시는 (예수가 왕위를 받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 예수가 왕위를 받고 돌아오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종들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주인이 왕으로 다시 부임할 때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재능과 상관없이 한 므나씩 받았지만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해서 남겨야 한다. 남긴 만큼 누린다. 차별인 것 같지만 순종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장사를 해서 남기라는 명령에 불순종한다면, 주어졌던 한 므나도 도로 빼앗기게 될 것이다. ( 그는 주인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주인을 깐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종의 신분이 유지 되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빼앗기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무익한 종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된다.)

//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 예수가 왕이 되는 나라를 거부한 백성들, 곧 세상나라는 주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사망의 벌을 받는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다스리시고, 성도들이 예수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가 맞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 예수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열 명의 종들과 달리 먼 나라에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세력과 규모가 더 크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 나에게 맡겨 주신 한 므나로 장사를 해서 남기라고 하신다.

// 장사해서 열 므나를 남기고,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윤을 내서 내 주머니를 (창고를) 크게 했다는 의미보다는, 장사를 해서 다른 열 사람, 다섯 사람에게 한 므나씩을 나누었다고 이해하면 어떨까? 성도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 나를 위해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다.

누가복음 19:1-10 읽기

1-2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가셨다. 삭개오가 여리고에 살고 있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며 부자였다. // 삭개오는 부자 청년 관원과 대비된다. 그냥 세리가 아니라 세관장으로 부와 함께 권력도 거머쥔 사람이었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무리에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 삭개오는  여리고 입구에서 구걸하던 맹인과 대비된다. 맹인은 육신의 눈이 멀어 볼 수 없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무리에 막혀 예수를 볼 수 없었다.

4 키가 작아 예수를 볼 수 없었던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예수께서 가시는 길 앞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다. // 구걸하던 맹인은 예수를 큰 소리로 불렀다. 거듭 불렀다.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 둘의 열심을 막을 수 없었다.

5 예수께서 뽕나무 아래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 구걸하던 맹인에게 다가가셨던 예수는 이번에는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다가가셨다. 맹인에게는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고, 삭개오에게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셨다.

6-7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예수의 방문을 기뻐하며 집으로 모셨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렸다. // 눈을 뜬 맹인이 예수를 따랐다면, 이번에는 예수께서 삭개오를 따라 삭개오 집으로 들어가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예수와 함께 함이 기쁨이다.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 세리를 의롭다 하신 주님은 자칭 타칭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신다.

8 예수를 집으로 모신 삭개오가 주님께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 삭개오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약탈 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뭔가 지나쳐 보인다. 그러나 삭개오의 진심은 분명하다. 주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삶이 달라진다. 나의 소유는 없어지고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된다.

9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오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누가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삭개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구원자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떨어져 나간 백성들을 찾아, 다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 ‘구원’은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