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9:7-21 읽기

7 아비멜렉으로부터 살아 남은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외쳤다.

8-15 [하루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다. 나무들은 올리브 나무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기름을 내는 일을 그만 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나무들은 무화과 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달고 맛있는 과일 맺기를 그만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지 않겠다면 거절했다.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하자, 포도나무도 하나님과 사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 내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말했다. 가시나무는 정말로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 나무들의 왕으로 삼고 싶으냐며 되묻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면, 자기의 그늘 아래로 피하라고 말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시덤불에서 불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리겠다고 말했다.]

16-20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일이 어찌 옳고 마땅하냐고 반문한다. 이 일은 여룹바알과 그 집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일도 보답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요담은 기드온이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세겜사람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해 내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도 세겜 사람들이 일흔 명이나 되는 기드온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기드온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을 혈육이라고 세겜 성읍을 다스릴 왕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 일이 옳고 마땅한 일이라면 아비멜렉과 더불어 기쁨을 누리라고 비꼰다. 옳고 마땅한 일이 아니라면 아비멜렉과 세겜 성읍 사람들은 서로 불을 뿜고 살라버리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저주? 한다.

21 요담은 (이 말을 마치고) 도망하여 브엘로 피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두려워 그곳에서 머물러 살았다.

//살아 남은 요담이 아비멜렉을 피해 브엘에 은둔하여 산 것을 보아, 세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전한 것이 그가 할 일의 전부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요담을 통해 전해주신 나무들이 왕을 세우는 이야기는 왕의 자질을 말하지 않는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세우려는 것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한 왕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나무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면 된다. 나무들 사이에 왕을 세우면, 세움을 받은 왕과 왕을 세운 나무들 사이에는 결국 싸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세움을 받은 왕이 큰자일까? 왕을 세운 사람들이 큰자일까? 사람들 사이에서는 큰자와 작은자의 관계가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화평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사기 9:1-6 읽기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릭이 세겜에 있는 외가를 찾았다. 그리고 세겜 성읍 사람들에게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 모두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 지 물었다. 그리고 자기는 세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세겜 사람들의 마음은 아비멜렉에게 기울어졌다. 그래서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일흔 양을 꺼내어 아비멜렉에게 주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고용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오브라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다.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만 숨어서 살아 남았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의 온 집안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

//아비멜렉은 지연 혈연을 이용해 동네 왕이 되었다.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일흔 명의 이복 형제들 중 숨어버린 요담을 제외한 모두를 죽였다. 좋게 말하면 통합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분열이었다. 더군다나 검은 돈과 유착된 사건이었다. 사관은 ‘기드온의 아들들’ 대신 ‘여룹바알의 아들들’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함으로써 기드온의 아들들이 ‘여룹바알’의 상속자가 되는데 실패했음을 강조한다. 요즘 정치판을 보는 씁쓸함. //성도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대충이 아니라 온전히 복종하게 될 때까지 ‘여룹바알’해야 한다.    

사사기 8:22-35 읽기

22-27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을 장군으로 칭송하였다. 그리고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기드온이 다스리고, 대를 이어 기드온의 아들과 손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해 달라는 것은 곧 왕이 되어 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기드온은 왕이 되지 않을 것이고, 아들에게도 왕의 자리를 세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다. 기드온은 왕좌 대신 전리품 일부를 개인 몫으로 달라고 했다. 13만 5천 미디안 연합군은 모두 금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기드온이 받은 금 귀고리는 무게로 천칠백 세겔이나 되었다. 금 귀고리 밖에도 초승달 모양의 장식품과 패물들,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주색 옷과 낙타목에 둘렀던 사슬도 받았다. 기드온은 이것들을 가지고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가 사는 오브라 성읍에 두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그것을 음란하게 섬겼다.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

28 미디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그 땅은 전쟁이 없이 평온했다.

29-35 기드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친아들만 일흔명이나 되었다. 세겜에 있는 첩과의 사이에서도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기드온은 장수하다가 죽었다.  기드온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바알들을 음란하게 섬기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은 주위의 모든 적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 내신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 여룹바알 기드온. 바알과 맞서 싸운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선(하나님의 뜻)을 베풀었지만, 아무도 기드온의 가족에게 은혜를 갚지 않았다.

//기드온은 아리까리하다.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왕이기 때문에 왕이 되지 않겠다고 대답했으면서도, 첩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왕은 나의 아버지)’이라고 지었으니, 스스로를 왕으로 자처한 셈이다. 심지어 에봇을 하나 만들어 자기 집에 두었으니, 스스로를 대제사장으로도 세운 셈이다. 주님은 이런 기드온에게 부와 장수의 축복까지 허락하셨다. 그러나 사사기 기자는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올가미라고 말한다. (솔로몬 때 반복된다.)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던 바알 제단을 헐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던 기드온, 그러나 기드온의 아들들은 다시 바알을 섬기고, 바알브릿 신상을 만들었다. 사관은 이 모든 것이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기록한다. 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주 예수를 마음에 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십년의 평온은 보장받을 수 있으나 진정항 평온도 영원한 평온도 아니다. 임마누엘만이 영원한 평온이다.

사사기 8:1-21 읽기

1-3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기드온에 가져와서, 기드온에게 싸우러 나갈 때 왜 에브라이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두 우두머리를 에브라임의 손에 넘겨 주셨다고 에브라임을 칭송하자, 에브라임은 기드온에 대한 노여움을 풀었다. 

4-9 기드온과 삼백 용사는 요단 강을 건너 지침 몸을 이끌고 적들을 계속 추격했다. 숙곳을 지날 때 숙곳 사람들에게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느라 지쳤으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부탁했다. 숙곳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거절했다. 기드온은 주님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자기에게 넘겨 주시면,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의 살을 찌르고야 말겠다고 대답하고 브누엘로 갔다. 기드온은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같은 사정을 했으나 브누엘 사람들도 숙곳 사람들과 같은 대답을 했다. 기드온은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성한 몸으로 돌아오는 날, 브누엘의 망대를 헐어버리겠다고 말했다.

10-12 세바와 살문나의 군대 13만 5천명 중 살아남은 자는 겨우 만오천 명이었다. 기드온은 방심하고 있는 세바와 살문나의 군대를 기습했다. 기드온과 삼백용사는 도망친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결국 사로 잡았고, 온 군대를 전멸시켰다.

13-17 기드온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숙곳에서 포로로 잡은 세바와 살문나를 보여주며, 숙곳 성읍의 장로들을 체포한 다음 들가시와 찔레를 가져다가 응징했다. 그리고 브누엘 망대로 헐고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

18-21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가 다볼에서 기드온의 동족을 죽인 죄 값을 물어 사형을 선고했다. 기드온은 맏아들 예델에게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어린 예델은 칼을 뽑지 못했다. 세바와 살문나는 기드온에게 사내 대장부답게 네게 직접 우리를 쳐라고 말했다.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쳐죽이고, 그들이 타던 낙타의 목에서 초승달 모양의 장식을 떼어 가졌다.

//기드온은 교묘히 에브라임을 칭송함으로 에브라임의 화를 푼다.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두 우두머리를 에브라임 손에 넘겨 주셨다고 말하며, 주님께만 돌려야만 할 영광을 에브라임에게 돌린 것이다. //기드온과 삼백용사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했다. (주님의 뜻이었을까?) 추격에 지쳐 숙곳과 브누엘 사람에게 먹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기드온은 승전을 빌미로 그들에게 보복하겠다고 다짐한다. 과연 합당한 보복인가? 악으로 악을 갚는 태도가 아닌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끝까지 추격한 이유가 개인적인 복수심이라는 것도 밝혀진다. 그렇다고 어린 아들에게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라는 명을 한 기드온은 제 정신일까? 미디안의 두 왕을 죽이는 영광을 아들에게 세습하려는 기드온의 욕심이 아닐까? //‘주님을 위하여’로 마쳐야 할 전쟁이, ‘주님을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로 변질 되더니, ‘기드온을 위하여’로 마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ㅠㅠ

사사기 7:15-25 읽기

15-18 기드온은 미디안 병사의 꿈과 해몽을 듣고 주님께 경배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와서 삼백 용사에게 ‘일어나라! 주님께서 미디안의 진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다!’ 하고 외쳤다. 기드온은 삼백명을 세 부대로 나누고, 각 사람에게 나팔과 횃불을 감춘 항아리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기드온이 적진의 끝에 가서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명령했다. 기드온과 함께 한 부대가 함께 나팔을 불면 다른 두 부대도 적진의 사방에서 나팔을 불면서 ‘주님 만세! 기드온 만세!’ 하고 외치라고 명령했다.

19-22 기드온과 함께 한 백명이 적진의 끝에 다다른 때는 미디안 군대의 보초가 교대를 막 끝낸 한밤중이었다. 기드온 부대는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밝혔다. 다른 두 부대도 나팔을 불며 단지를 깨고 횃불을 들고 ‘주님의 칼! 기드온의 칼’ 하고 외쳤다. 세 부대가 제자리에서 적진을 포위하니 적군은 모두 아우성 치며 달아났다. 주님께서 모든 적들이 저희들끼리 칼로 치게 하셨다. 적군은 도망하여 스레라의 벳싯다,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선까지 후퇴했다.

23-25 납달리 지파, 아셀 지파, 므낫세 지파에서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디안 군대를 추격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전령들을 보내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라고 명령했다. 퇴각하는 미디안을 앞질러 벳바라와 요단강에 이르기까지 나루들을 점령하라고 전령을 보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 전한 대로 나루들을 점령했다. 그들은 미디안의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이고, 계속 미디안을 추격했다. 그리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있는 기드온에게 가져왔다.

//기드온은 ‘주님 만세’에 왜 ‘기드온 만세’를 덧 붙였을까? ‘주님의 칼’에 왜 ‘기드온의 칼’을 덧 붙였을까? ‘주님께서 미디안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다.’ 하고 외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드온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전쟁에 참여시킨 이유는 또 무엇일까? 주님께서 명하신 것일까? 또 에브라임 사람들이 처음에는 기드온의 부름에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가 (기드온이 므낫세, 아셀, 스블론, 납달리 지파만 부르고 에브라임을 부르지 않아서?) 기드온의 전령에 전쟁에 적극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늦게나마 밥상에 숟가락을 얹기위해서일까? //주님의 일에 사람들의 생각이 덧붙여지면서 복잡해 진다. 아무리 이미 이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해서 나의 영광을 구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만 위하면 된다. 주님의 칼만 선포되면 된다. 세례 요한은  “그는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다. 세례요한은 ‘주님도 흥하고 나도 흥하고’를 경계 했던 것이다. //내가 흥해야 주님이 흥한다는 착각을 하는 성도가 많다. 그러나 내가 망해도 주님은 흥하신다. 오히려 주님만 흥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