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유월절? 명절이 다시 왔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곁에 ‘베드자다(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에 정자가 다섯개 있었다. 정자마다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이 누워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결렸든지 나았기 때문이었다.
5-9a 정자에 누워있는 병자 중에 서른 여덟해 동안 병자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있는 그를 보시고 그가 이미 오랜 세월 정자에 누워있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낫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 병자는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 병자에게 ‘일어나서 침낭을 걷어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그 즉시 나아서, 침낭을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9b -15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니 침낭을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침낭을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셨소’ 하고 대답했다. 유대 사람들이 ‘그 사람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병이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예수께서 이미 유월절로 사람들이 붐비는 가운데 그곳을 빠져나가셨다. 그러나 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저자 요한이 기록한 표징은 모두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천사보다 더 뛰어나신 성자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을 하루에도 몇 번 씩 휘저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자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경쟁시키지 않으셨다. 대신 가장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병자를 말씀으로 낫게 해주셨다. 가장 나중 된 자를 먼저 된 자로 삼으셨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던 병자를 도우셨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경쟁을 물리치고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가야 한다. 경쟁은 공평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실상은 불공평이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병자는 38년을 기다려도 자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의지할 사람이 있어도 일등은 언제나 한 명이다. 저자 요한은 출발선에 적어도 5명은 서있다고 기록한다. (길다란 정자가 5개나 있었다.) 2선 3선에서도 틈을 노려 출발하려는 자도 많았다. 예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뒷쪽으로 밀린 병자를 구해내셨다. 그렇다고 베데스다 연못에 풍덩 던져 넣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병자는 순종했다.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한 후 가장 먼저 뛰어 든 병자는 과연 나음을 입었을까? 병자들은 다른 병자에게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이 먼저 뛰어들어야 했다. 물이 동한 후 뛰어 들었는데도 병이 낫지 않으면 저쪽 어딘가에서 자기보다 먼저 뛰어든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말았을 것이다. 병이 나은 사람이 정말 있었는지 궁금하다.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믿음이 자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대 사람들처럼 안식일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생명(영생)이라면,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가깝다하여도 여전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고침을 받았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죄를 지으면 더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신다. 병자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예수께서 죄인들 가운데 오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