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14 읽기

1-6 요한보다 예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신다는 소식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는 것을 예수께서 아셨다. 사실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아마 바리새파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신듯. 아직 때가 아니었기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르 거쳐서 다시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마을에 도착하셨다. 이곳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며,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피곤한 몸을 우물가에 앉아 쉬셨다. 때는 여섯 시쯤 되었다. (육시를 유대 시간 육시로 해석해서 우리 시간 정오(오정)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요한복음 다른 곳에서 (19:14 제육시 – 오전6시) 로마 시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저녁 6시라는 견해를 따르고 싶다.)

7-14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다. 예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

예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시오.

여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말도 섞지 않았다.)

예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너가 그에게 물을 달라고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다.

여자) 주여, (당신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우리에게 주셔서, 야곱의 후손인 우리와 짐승들이 마셨는데,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큽니까? (당신이 야곱의 우물에서 길은 물보다 더 좋은 물을 줄 수 있습니까?)

예수)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걸으셨던 예수께서는 피곤함을 씻기 위해 우물가를 찾으셨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에서 머물 곳을 찾기는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그네 유대인들을 환대할 집이 있었을까? 더구나 예수의 일행은 어느 한 집이 대접하기에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음식이라도 구하기 위해서 동네에 들어갔고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쉬고 계셨다. //때마침 하루 일과를 마친 사마리아 여자 한 명도 우물가에 왔다. (이 여인이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의 육시, 곧 대낮에 우물가에 나왔다는 증거는 없다.) 예수와 여인 모두 쉼을 얻기 위해 우물가에 왔다고 보는 편이 낫다. 물론 예수께서는 육체의 피로보다는 자기 백성 유대인들의 배척과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아서 힘드셨을 것이다. 여인의 갈급함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한 것을 아셨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좋은 물, 가장 좋은 물, 곧 성령을 구하는 여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여인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사마리아 여인이랴. 그래서 예수께서 만나주고 계신다. ///예수를 만나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몸이 피곤하더라도 예수가 계신 우물가를 찾으라. 아침이든 저녁이든, 그 어느 때라도… 예수께서 이미 문을 두드라고 계신다. 문을 열고 영접하라.

요한복음 3:22-36 읽기

22-30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치신 후, 예수는 제자들과 유대지방으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서 요한도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 아직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어떤 유대 사람이이 정결예법을 두구 논쟁을 걸어왔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와서 요한이 증언한 예수께서 요단 강 건너 편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예수에게로 모여든다고 보고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대답했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들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는 예수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해야 한다. 신랑이 신부를 차지한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을 맞이하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은 예수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다. 철저하게 예수는 큰자요 자신은 작은자로 여겼다.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큰 자나 이인자가 아니라, 작은자 중의 작은자가 되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예수도 흥하고 나고 흥하고가 아니다. 오직 예수다. 그리고 요한 자신은 혼인잔치의 신랑도 들러리도 아니지만, 그저 친구로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으로 가득차있다고 선언한다.

31-36 (신랑의 음성을 듣는 기쁨으로 가득찬 요한의 대답이 이어진다) “위에서 오신 예수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하지만, 하늘에서 오시는 이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그의 증언을 받아 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다.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31-36절은 요한의 말이 이어지는 것이지만,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듯 이런 기쁨으로 충만한 요한이 마치 예수의 말씀을 (신랑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분위기다.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기록한다. 믿음을 순종이라고 한다. 믿지 않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한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순종 하는지 불순종 하는지는 눈에 보인다.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증언)하기 위해서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성령을 아낌없이 주셔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맡기겼다. 하나님은 성도에게도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순종하는 성도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상속자로 삼으신다. 이렇듯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영생이다.  

요한복음 3:16-21 읽기

예수) 하나님께서 (불뱀에 죽어 마땅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모세가 든 놋뱀을 보면 살게 하셨듯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이란, 빛이 세상에 비췄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하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는 사람이요,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 행위가 빛에 드러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리를 (말씀 대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기 위해  빛으로 나아온다. 

//3장 16절은 14,15절과 댓구절이다. 16절의 하반부는 15절을 반복한다. 따라서 16절의 앞부분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는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를 부연설명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해석을 빌려온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그 핏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이것을 믿는 자, 곧 이것에 의탁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 //심판은 미래적이지 않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빛이신 예수께로 나오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자기들의 악행이 드러날까봐 두려워 하는 자들과 달리, 진리를 행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기 위해 빛가운데 살아간다. //심판은 ‘악행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묻지 않고 ‘빛가운데 나아오느냐 아니냐’를 묻는다. 모든 사람은 다 죄를 범한(했)다.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예수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예수를 내어주심을 믿는 자가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3장1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게 한다. 

요한복음 3:1-15 읽기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기 시작했다. 곧 메시야, 구주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사람들 중에 바리새파 사람인 ‘니고데모’가 있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니고데모는 밤에 조용히 예수를 찾았다. 니고데모는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갔다.

니고데모)  우리는 (바리새파는? 예수의 이름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진실로 진실로 말하는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지 않으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임마누엘이 아니면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임마누엘이란 (표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니고데모)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한번 더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 진실로 진실로 말하는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이 영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에 놀라지 말아라. 바람이 임으로 불 때, 너는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모두 그렇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은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영으로 나는 것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임마누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처럼 느낄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보는 나라가 아니라, 삶으로 누리는 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는 삶이다. 

니고데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않는구나.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들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니도데모는 어떻게? 라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 곧 구약 말씀을 잘 알고 있다면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받지 않는다고 책망하신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땅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자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야 마땅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모세가 든 놋뱀을 보면 살았던 것을 상기시킨다. 마찬가지로 우리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신다. 거듭남은 예수 안에 사는 것이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은 예수를 믿는 자만이 누린다.

요한복음 2:13-25 읽기

13-22 유월절이 가까워졌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을 보셨다.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과 함께 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다.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환전소 테이블을 둘러 엎으셨다. 예수께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걷어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권리가 있다면, 그 표징을 보여 주시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 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게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성도는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대화 (기도) 하는 성전을 탐욕을 채우는 곳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제자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을 기억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의 주인으로 예수를 모셨다면, 정결한 마음을 구해야 한다. 성령이 거두어지는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거나 헌금용 돈을 환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가 개인의 복을 구하는 점집화 되거나, 사교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교회 공동체적으로도 정결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깨끗하게 청소되어야 한다.

23-25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원대로 행하지 않으셨다. 곧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한 분이 아니셨다. 사람의 마음 속까지 훤히 알고 계신 분이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예수의 이름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고 저자 요한을 기록한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 속까지 훤히 아시는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 예수를 모시지 않았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믿음이란 내가 예수 안에, 예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