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7 사람들이 눈뜬 사람에게 “그 사람이 (예수가) 어디에 있소?” 하고 물었지만, 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예수께서 눈먼 사람에게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눈뜬 사람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바른 다음에 눈을 씻으니 보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말했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눈을 뜨게 하는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했다. 그들가운데 의견이 갈라졌다. 그들은 눈뜬 사람에게 그를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눈뜬 사람은 “그분은(예수는) 예언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18-23 유대 사람들은 그가 전에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 부모를 불렀다. 그들은 눈뜬 사람의 부모에게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가 눈을 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그 부모가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는 이미 성인이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그가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 둘러댔던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장성한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께서 베데스다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과 유사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표징이 드러났다는 부류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부류로 분열되었다.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따르느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달리, 눈뜬 사람은 예수를 예언자라고 분명한 증언을 한다. //눈뜬 사람의 간증에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사실이 아니면, 분명한 사실마져 부인하게 한다. 사람들은 눈뜬 사람의 부모를 불러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의 부모는 사실만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유대교 신앙과 전통에 굴복해 아들처럼 ‘예수는 예언자입니다’ 하고 직접 증언하는 대신 성인이 된 아들에게 다시 공을 넘겼다. ///베드로는 (벧전 3:8~에서)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하고 교훈한다. 나에게 생명을 사랑하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는 사실(삶)이 있어야, 나의 선생행을 욕하는 자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과 전통으로 (종교적 열심으로) 떠드는 것은 고성방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