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유월절이 엿새 후로 다가왔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에 가셨다. 베다니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제자들?)과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 예수의 제자 중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낭비하냐고 말했다. (가룟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회계 일을 맡으면서 이미 공금에 손을 대었던 도둑이었다.) 예수께서 “그대로 두어라, 그는(마리아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향유를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9-12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베다니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도 보고,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했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했다.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예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지 않는 예수!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언제나 함께 있는 가난한 사람들! 마찬가지다. 내가 여유있을 때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을 때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와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예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곧 가난한 자에게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함이 복이요, 복은 곧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임마누엘! //삼백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년봉에 해당된다. 마리아는 년봉을 몽땅 예수께 드린 것이나, 예수께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액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부의 두 렙돈처럼, 많은 액수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려야 제값을 한다. 천국은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보화가 묻힌 밭을 사는 것이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진주를 사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차별이 없이 적용된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로, 곧 자기 소유의 전부로 예수의 다스림을, 곧 천국을 산다. //예수도 보고 나사로도 보고. 예수는 교회당 안에 없다. 결국 세상은 성도를 보고 예수를 찾게 된다. 성도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나사로처럼) 죽어서도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음전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