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4:22-35 읽기

22-26 최고 통치자가 실수로 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겨, 그 허물로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속죄제물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제물은 흠없는 숫염소 한마리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통해 통치자가 (족장이) 지은 죄를 속하여 주면, 그 통치자는 용서를 받는다.

27-31 일반 평민이 실수로 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한 것 가운데 하나라도 어겨서 그 허물로 벌을 받게 되었을 때 바쳐야 할 속죄제물과 정차를 알려주신다. 제물은 흠없는 암염소 한마리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통해 제물을 가져온 평민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용서를 받는다.

32-35 평민이 속죄제물로 암염소 대신 흠없는 암양을 가져와도 된다.

//최고통치자(새번역), 곧 족장(개역개정)이 죄를 범하든, 일반 백성(평민)이 죄를 범하든, 제사장이 속죄제사를 드려야 그 사람은 용서받는다. 지위고하에 차이가 없다. 물론 통치자는 흠없는 숫염소를 드려야 하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드려야 했다. 오늘날 살아있는 암염소가 숫염소보다 비쌀 것 같은데, 그래도 덩치는 (제물적 가치는, 고깃값은) 숫염소가 크지 않을까 한다. //앞선 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제물에 안수하고 제물을 잡아야 하고 제물을 다듬어야 한다. 다시말해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과정에 동참해야 한다. 성도도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속죄제사는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바로 드려야 한다. 미루면 안 된다. 그런데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차이가 있다. 개역개정은 다른 사람이 족장이나 평민의 죄를 깨우쳐주면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번역하고, 새번역은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번역한다. 곧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았든 지은 죄는 깨닫는 대로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공동체적인 죄든 개인적인 죄든 구분이 없다. ////통치자의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의 지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겸손히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선 이런 덕목을 가진 분이 있는지? 

레위기 4:1-21 읽기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가 주님께 들은 말씀이라고 적지 않는다. 주어가 ‘주님’이다.) 사람이 실수로 주님의 명령을 하나라도 어겼을 경우 어떻게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3-12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은 경우, 그 벌이 백성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흠없는 수송아지를 어떻게 속죄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말씀하신다.

13-21 이스라엘 회중이 실수로 죄를 지은 경우, 비록 깨닫지 못한 죄를 지었을 경우, 주님의 명령을 하나라도 어겨서 벌을 받게 된 경우, 죄를 그들 스스로가 깨닫는 대로 수송아지를 속죄제물을 바치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속죄의 제사는 회중 (이스라엘 공동체) 뿐만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받은 제사장들도 당연히 드려야 한다. 특별히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백성의 허물이 된다. 그 벌이 백성(회중)에게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제사장이 먼저 용서 받아야 된다. 제사장의 속죄가 먼저 언급된 이유다. 속죄의 제사는 주님의 명령을 하나라도 어겨 벌을 받게 된 경우 뿐만 아니라, 회중이 함께 책임져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경우, 깨닫지 못한 죄를 지었거나 실수로 죄를 지은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곧 모든 잘못은 속죄받아야 한다. //속죄제물은 수송아지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속죄제물은 ‘흠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라고 기록하는데, 회중의 속죄제물에는 ‘흠없는’이 빠졌다. 이것이 의미있는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데 흠없는 제물이 어디 있으랴? 완전무결한 수송아지 제물은 없다. 그런데 흠없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몸소 제물이 되어주셨다. 즉 성도는 (죄없는 대제사장 예수께서 드린) 완전무결한 속죄제물로 속죄함을 받았다. //이스라엘 회중은 죄를 깨닫는 대로 속죄제물을 바쳐야 했다. 성도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한마디로 공동체의 죄를 깨닫는 대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성도는 속죄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지하여 죄를 깨달을 때마다 회개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곧 죄를 깨닫는 것이다. 회개는 이미 속죄받은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레위기 3:1-17 읽기

화목제의 제물에 관하여 가르쳐 주신다. 

1-6 화목제물로 소를 드릴 때는 수컷 암컷 구분 없이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 예물의 (제물을 예물이라고 표현한다.)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고,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려야 한다. 화목제 제물의 일부는 화제로 드린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려진다.

7-11 화목제물로 양으로 드릴 경우에도 수컷 암컷 구분 없이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한다. 주로 어린 양을 예물로 드렸나보다. 화목제물로 소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화제로 드린다.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이다.

12-16 화목제물로 염소를 드릴 경우에도 양을 드릴 때와 마찬가지다. 모든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다.

17기름과 피를 먹지말라고 하신다. 이 명령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화목제물은 예물이라고도 번역한다. 예물은 제물보다 인격적이다. 수직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다는 뜻이리라.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화제다. (번제도 제사의 이름이며 번제를 드리는 방법도 화제다. 곧 불에 태워 올려드리는 제사다. 번제와 화목제의 화제가  다른 점은 번제는 제물 전부를 태워 올리고, 화목제는 제물 일부를 태워 올린다.) //화목제의 화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음식이라고 설명한다. (젯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 곧 화목제물은 제물의 일부를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드리는 사람과 제사장들이 함께 먹는다. 하여간 젯밥은 결국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 나눠먹는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향기로운 냄새를 받으시고 고기로는 백성의 배를 채워주신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밥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시편 23편 시인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노래한다. 주의 백성이 주께서 차려주시는 밥상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 ‘임마누엘’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성찬과 말씀(말씀에 순종함)으로 이 복을 누린다.   

레위기 2:1-16 읽기

레위기의 주어는 ‘나’ 곧 하나님이시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받으시는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1-3 곡식제물에 대한 말씀이다. 곡식제물을 드리는 방법의 핵심은 ‘정성’이다. 가축제물은 모두 다 불태워 불살라 바치는데, 곡식제물은 한 줌을 불살라 바치고 남은 것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린다. 제사장들은 주께 바치는 제물, 곧 주님으로부터 가장 거룩한 것을 받아 누린다.

4-7 곡식제물을 화덕에 구워 제물로 바칠 수도 있었다. 누룩을 넣지 말라고 하신다. 기름을 바르거나 부으라고 하신다. 곡식제물을 냄비에다 구웠어도 마찬가지다.

8-10 곡식제물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곡식제물의 일부를 제단 위에 올려 불살라 드린다. 불살라 드리는 이유는 일부지만 모두 바쳤다는 표시다.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곡식제물 가운데서 남은 것은 제사장 몫으로 돌린다.

11-13 곡식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룩과 꿀은 불살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누룩과 꿀을 제물로 드릴 수는 있어도 불살라 드려셔는 안 된다. 대신 곡식제물에는 소금을 넣으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넣은 소금을 넣으라고 명령하신다.

14-16 수확후 햇곡식을 제물로 바칠 때는 햇곡식을 볶거나 찧은 것으로 바치라고 하신다. 모든 곡식제물은 기름과 향을 넣어 드리라고 하신다. 곡식제물을 태울 때는 전부가 아니라 모두 바치는 정성의 표시로 일부만 드리라고 하신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이렇게 드려야지 하고 쓴 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방법이다. 오늘은 곡식제물(소제)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곡식제물은 일부만 불살라 바치는데 한 줌만 불살라도, 나머지 곡식 모두가 바쳐졌다는 표가 나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다. 주일예배는 나머지 모든 일상생활도 예배라는 대표성을 지닌다. 일상이 정성을 다한 예배로 드려져야 하나님께서 주일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곡식제물 가운데서 남은 것은 제사장 몫이라고 하신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소유, 가장 거룩한 것을 받아 누린다. (직분자와 소위 평신도 구분없이) 성도는 제사장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지고 남은 것은 결국 성도의 몫이 된다. 일상의 예배는 결국 교회공동체를 유익하게 한다.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삶이다. //누룩과 꿀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도 예배로 받으시지만, 정말 기뻐하시는 예배는 정결한 삶(소금)이라고 가르쳐주시는 것은 아닐까? 소금을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넣는 것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정결한 삶은 언약에 신실한,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레위기 1:17 읽기

1-2 주님께서 모세를 회막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제물과 제물을 바치는 법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3-9 소를 번제물로 바칠 때는 흠 없는 수컷을 골라 회막 어귀에서 바쳐야 하는데. 주님께서 기꺼이 받게 바쳐야 한다. … 제사는 제물을 가져온 사람과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는 제사장들이 함께 드린다.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제물에 안수하고, 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를 받아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뿌리고,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고기 저민 것과 제물의 머리와 기름기를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고, 제단 위에서 불살라야 한다. 번제는 이렇게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다.

10-13 바치는 제물이 양이나 염소인 경우에도 흠 없는 수컷을 골라 바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물을 가져온 사람과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협업해서 드린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다.

14-17 번제물이 날짐승인 경우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 가운데서 골라 바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물을 가져온 사람과 제사장 협업해서  드린다.

//레위기의 제사와 제사법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더군다나 우리는 이런 제사를 더이상 드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제사의 종류와 방법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제사의 핵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예배에 적용할 교훈을 찾아 본다. //제사의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고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시도록 드려야 한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다. 흠이 없다는 것은 제물의 상태를 뜻하지만,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제물을 뜻한다. 세상에 흠이 없이 완벽한 것이 어디 있으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 밖에 없다.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다.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우리 몸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뜻한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영적예배, 곧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몸을 불살라 태워서라도 (내 뜻을 완전히 태워 버리고) 내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신다.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를 때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제사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사장들의 협업이다. 예배도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삶이다. 예배는 결코 개인적이지도 그렇다고 일률적이지도 않다. 공동체적이지만, 각자의 분수에 맞게 드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