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7:1-28:2 읽기

1-4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에 머물렀다. 사울이 잘못을 고백하고서도 돌이키지 않았다고 적용했다.) 다윗은 언젠가는사울의 손에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블레셋 땅으로 망명하기하기로 했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하며 그 때에 사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 갔다. 사울은 다윗이 가드로 도망쳤다는 소식에 다시는 다윗을 찾지 않았다.

5-7 다윗은 아기스를 다시 찾아 지방 성읍을 하나 주면 그곳에 정착해서 (조용히) 살겠다고 말했다. (처음 아기스 왕에게 혼자 피했을 때는 미친 척하다 결국 도망쳐야 했는데…) 아기스는 별 생각없이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다윗은 블레셋 지역에서 일년 넉달을 보냈다.

8-28:2 다윗은 블레셋 지역에 머물면서 부하들을 데리고 수르 광야와 이집트 국경지역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습격했다. 다윗은 그들이 사는 지역을 습격할 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진멸하고 가축과 옷을 약탈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는 유다의 남쪽 지역, 여라무엘 족속의 남쪽 지역, 겐 족속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고 얼버무렸다. 다윗은 정체가 드러날까봐 남녀를 불문하고 다 죽였던 것이다. 아기스는 다윗의 말을 믿었다. 아기스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움받은 짓을 했으니 영원히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가려고 모든 부대를 집결시켰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블레셋 편이 되어 출정하지고 말했다. 다윗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기스는 다윗을 자신의 종신 경호대장으로 삼았다.

//가드 왕 아기스는 어떤 사람일까?  아기스 왕은 자신에게 왔다가, 미친 척하며 도망했었던 다윗이 다시 찾아 왔는데 받아주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무장한) 육백명의 무리를 이끌고 왔으니 싸우기가 귀찮아서였을까? 아니면 용병?으로 쓸 계획이었을까? 하여간 아기스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원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망명요청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시글락에 난민 캠프를 차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시글락에 난민 캠프를 차린 다윗 일당은 그곳에서 아기스 몰래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쳤다. 다윗은 16개월동안 아기스를 속였다. 사람을 진멸시켜 증인을 인멸시켰다 해도,전리품인 의복을 보고도 다윗이 친 마을들이 이스라엘 인지 아닌지 몰랐을까? 가나안 지역 사람들이 입는 옷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기스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부대를 집결시키자 다윗은 아기스의 경호대장으로 참전해야 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되었다. ///도망을 가고 있어서였을까? 다윗이 주님께 묻고 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사울을 피하기 위해 다시 아기스를 찾을 때도, 이스라엘 대적들을 약탈하고 진멸할 때도, 그리고 아기스가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치자고 했을 때도 다윗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한 문제였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에 지속적으로 이끌리는 중이었든지. 그런데 다윗이 아기스의 경호대장이 되어버린 진퇴양난에 빠진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과라고 느껴진다. 저자는 1절에서 다윗이 혼자서 생각했다고 이미 결과를 예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한 것도,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자신감이 넘칠 때도, 주님께 묻자. 주님께 묻자. 항상 겸손하게.

사무엘상 26:13-25 읽기

13-14 다윗은 맞은 편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다윗과 사울의 거리가 꽤 멀어졌다. 다윗은 사울의 장군 아브넬과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아브넬은 누가 감히 임금님을 깨우냐고 받아쳤다.

15-16 다윗은 아브넬에게 이스라엘의 장군으로 어찌 임금님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느냐고, 이미 한 사람이 임금님을 범하려고 들어갔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왕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냐고 추궁했다.

17-20 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듣고 정녕 다윗이냐고 묻자 다윗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왜 자신을 잡으러 나왔냐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주님이 사울에게 자신을 치라고 하셨다면 자신이 기꺼이 죽겠다고 대답했다. 만약 사람이 사울을 충동했다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저주내리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으려고 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자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이방 땅에서 살해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자신은 사냥감이 아니라고 말했다.

21-25 사울은 잘못을 시인했다. 다시는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주었으니 자신도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큰 잘못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다윗은 사울에게 창을 돌려줄테니 졺은 종을 한 명 보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울에게 공의와 진실을 행하는 왕이 되라고 요청했다. 주님께서 임금님을 자신의 손에 넘겨 주셨지만,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임금님께 손을 대지 않았듯이,  주님께서는 임금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 자신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어떠한 궁지에서도 자신을 건져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사울이 다윗을 아들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그리고 다윗에게 능력이 있으니 매사에 형통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다윗은 자기 길로, 사울도 자기 궁으로 돌아갔다.

//25절에서 저자는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 하고 마무리 한다. 다윗은 다시 찾아 온 사울에게 보복할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다윗이 굳이 사울의 침소까지 갔다는 것은 마음 한 구석에서 나발을 죽이러 출정했을 때처럼, 사울을 제거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에 다윗의 마음을 지켜주셨다. 이것이 다윗이 간 길이었다. 한편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 다윗을 더 이상 쫓지 않기로 주님의 이름으로 약속 했건만, 맹세를 잊어버리고 반복적으로 다시 다윗을 잡으러 나왔다. 이번에도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 말을 했지만 사울이 이번에도 다시 자신의 어리석음에 머물 것이라는 중의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주님의 길을 따라 걸었고, 사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머물렀다. 다윗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사울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이다. 성도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다. 성도가 가야할 길이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사무엘상 26:1-12 읽기

1-5 십 광야 주민이 다시 한번 사울을 찾아와 다윗이 여시몬 맞은 편 하길라 산 속에 숨어 있다고 밀고했다. 사울은 삼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찾으러 직접 갔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온 것을 알았다. 다윗은 정찰대를 보내 사울이 진 친 곳을 확인한 후, 사울의 진 가까이 갔다. 사울은 진 한 가운데서 자고 있었고, 사울의 둘레를 군인들이 사방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6-12 다윗은 동행한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에게 중에서 아비새만 데리고 밤에 사울이 자고 있는 곳까지 갔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다윗이 타일렀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면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윗은 사울은 주님께서 치시든지, 늙어 죽든지, 아니면 전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윗은 재차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를 쳐서 죽이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사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가자고 말했다. 이렇게 다윗과 아비새는 창과 물병만 들고 사울의 진에서 빠져 나왔다. 주님께서 사울과 함께 한 사람들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보는 사람도 눈치채는 사람도 깨는 사람도 없었다.

//헷 사람 아히멜렉. 이름 뜻으로 따지면 왕(다윗)에게 형제와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다윗의 도망을 도왔던 제사장의 이름과 같다.)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 수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이니 조카였다. 조카인 아비새가 외삼촌 다윗을 따라 사울 진영까지 갔다. 아비새 대신 형제같은 아히멜렉이 함께 갔다면 다윗의 만류에도 사울을 죽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울은 다윗과의 언약을 (주님 앞에서 한 약속을) 깨고 다시 한번 다윗을 죽이기 위해 왔지만,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주님께서는 사울 진영의 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해서,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긴 다윗을 보호해 주셨다. ///그런데 왜 다윗의 누이 수루야의 아버지는 이새가 아니고 나하스(삼하17)일까? 다윗이 수루야의 아버지 나하스가 죽은 후, 수루야의 어머니와 이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새가 아들이 없는 나하스 가문의 기업을 무를 친족의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곧 다윗과 수루야는 이부동복, 곧 어머니는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같기 때문에 다윗은 어머니가 다른 이새의 아들들인 형들보다 누이들과 더 가까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조카들을 중용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하스는 이새의 다른 이름이어야 한다. ////혈통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도 함께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언약의) 피는, 혈통(물)보다 강하다. 성도는 물(혈통)이 아니라 (언약의) 피로 하나된 사이다.  

사무엘상 25:23-44 읽기

23-31 아비가일은 다윗을 왕처럼 마중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애원했다. 아비가일은 나발은 이름처럼 못되고 하는 일도 어리석으니 마음쓰지 말라고 말했다. 당시 자신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윗을 장군이라 부르며, 다윗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자들이 모두 나발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준비한 선물을 주면서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윗의 집안을 영구히 세워주시고 평생토록 재앙이 없기를 축복했다. 주님께서 다윗을 생명의 보자기에 싸서 보호하시고, 다윗을 거역하는 원수들의 생명은 주님께서 돌팔매로 던지듯이 팽개쳐 버리실 것이라고 말했다. 아비가일은 주님께서 약속대로 다윗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실 것이니 살인이나 개인적인 원수 갚는 일로 왕이 되실 때에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고 충언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윗에게 좋은 일을 베푸시는 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다.

32-35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주님께서 아비가일을 만나게 해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드린다고 말했다. 아비가일의 말대로 살인이나 스스로 원수 갚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준 아비가일에게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아비가일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다윗은 아비가일이 마주나오지 않았다면 나발 집안 사람들은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남자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뻔 했다고 말했다.

36-38 아비가일이 돌아와 보니, 나발은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해있었다. 아비가일은 나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나발이 술에서 깨었을 때, 아비가일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나발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발은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나발은 열흘쯤 지나 죽었다. 이렇게 주님께서 나발을 치셨다.

39-42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에 다윗은 주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시고 자신이 직접 악을 행하지 않게 막아주셨다며 주님을 찬양했다. 다윗은 종을 아비가일에게 보내 청혼을 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여 다섯 몸종과 함께 다윗에게 가서 아내가 되었다.

43-44 다윗에게는 이미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이라는 아내가 있었다. 다윗의 첫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지만, 사울이 미갈을 갈림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주었기 때문에, 다윗은 두 아내를 두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 준 이야기가 이미 백성사이에 퍼졌던 모양이다. 아비가일도 알고 있었기에 다윗에게 원수 갚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나발은 어리석게도 이 소문을 듣지 못했던지, 아니면 일부러 귀를 닫았던 모양이다.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아는 것에 대해 순종했다. 총명하다, 곧 지혜롭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만나 개인적인 보복으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된 것에 주님께 감사했다. 결국 주님께서 나발을 치심으로 다윗이 직접 악을 행하지 않도록 막아주셨다. 다윗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왔던 (총명했던)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했다. 물론 무릎꿇고 하는 현대식 청혼은 아니더라도 성서에 신랑이 신부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또 있나 싶다.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는 같은 마음을 품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나발의 모든 재산은 아들에게 상속되었을까?) 다윗에게 갔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 다윗을 택했다. 아비가일이 여전히 왕에게 쫓기는 신세요, 부마의 자리에서도 내쳐진 다윗에게 소망을 둘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언약 때문일 것이다.        

사무엘상 25:1-22 읽기

1 사무엘이 죽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사무엘의 고향 라마에 장사했다. 다윗은 바란 광야로 거처를 옮겼다.

2-8 마온에 부자 나발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갈멜에 목장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다. 그는 갈멜에 와서 양털을 깎고 있었다. 나발의 아내 이름은 아비가일로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다왔다. 반면 나발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했다. 그는 갈렙 족속이었다.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윗은 부하들 가운데 열 명을 보내 나발에게 안부를 전하고, 축복한 다음, 나발의 목자들에게 선대한 다윗 무리를 위해 먹거리를 부탁하게 했다.

9-13 다윗이 보낸 열 명의 젊은 부하들은 나발을 찾아 다윗이 시킨대로 말을 전했다. 나발은 이새의 아들 다윗과 거리를 두기로 마음먹었는지, 주인에게 반기를 든 세상에서 어찌 근본도 모르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겠느냐? 하고 박대했다. 다윗의 부하들은 돌아와 나발이 한 말을 그대로 다윗에게 전했다. 다윗은 사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을 치러 올라갔다.

14-17 나발의 일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비가일에게 다윗의 부하들이 왔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 일꾼은 다윗 무리가 밤낮으로 자신들을 성벽과 같이 잘 보살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다윗이 나발에게 틀림없이 앙갚음을 할 텐데, 고집불통 나발에게는 말도 붙일 수 없다고 했다.

18-22 아비가일은 서둘러 빵 이백덩이, 포도주 두 가죽부대, 이미 요리된 양 다섯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뭉치 백 개,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나귀 여러마리에 나눠 싣고, 남편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고 다윗을 마중 나갔다.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은 편에서 내려와 아비가일과 마주쳤다. 다윗은 선을 악으로 갚은 나발에게 속한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은 하나라도 남겨두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나발은 다윗을 잘 알고 있었다. 이새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발은 다윗이 사울과의 ‘군신유의’를 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이 주인에게 반기를 드는 세상이요, 다윗을 근본도 모르는 놈이라고 박대했던 것이다. 사관은 나발의 성품을 고집불통이 되어버리고 포악해진 사울의 성품과 동일시 한다. //그러나 사관은 나발을 갈렙 족속이라고 밝힌다. 유다지파의 다윗에게는 나발이야말로 유다 족보에서는 근본이 없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인물인 셈이다. 나발 자신이 근본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유다 편에 서야 할 나발은 베냐민 지파 사울 편에 설 만큼 ‘나발’스러웠다. 어리석었다. //나발이 이름 그대로 어리석어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었다면, 나발의 아내는 아비가일은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던 여자였다. 아비가일은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다윗을 막아선다. 얼마전 사울의 악을 선으로 갚았던 다윗이었건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윗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여인을 보내신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죽음이 다윗의 영성에 악영향을 미쳤을까? 그러나 주님은 나발의 일꾼들과 여인을 사용하셔서 다윗이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우리 사회에, 한국 교회에 영적 어른의 부재를 탓할 필요가 없다. 말씀에 순종하는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아니 돌처럼 생명없어 보이지만, 주의 말씀인 성서가 우리 손에 있다. “악에게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