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3:26-44

26-3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다. 이 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께 제물을 바쳐야 한다. 속죄일에도 하루 동안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일 대신 고행을 해야 한다. 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성에게서 끊어기제 해야 한다. 주님께서 고행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주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 버리겠다고 하신다. 어떤 일도 하지 말고 고행을 해라. 속죄일도 안식일이다. 9일 밤부터 시작하여 열흘날 저녁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33-38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달의 보름날부터 이레동안은 초막절이다. 초막절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초막절 이레 동안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가장 거룩한 모임으로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명한 절기들이 다가올 때마다 주의 백성은 거룩한 모임을 열고 각종 제사를 드려야 한다. 주께서 명한 절기들도 안식일처럼 지켜야 한다.

39-44 밭에서 곡식을 거둔 후,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동안 지키는 초막절의 첫날과 여드렛째날도 안식하는 날이다. 해마다 초막절 이레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즐겨라. 자손 대대로 이 절기를 지켜야 한다. 이레 동안 너희는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본토 사람은 누구나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모세는 주님께서 명하신 여러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주었다.

//속죄일에는 생업을 돕는 일을 하지 말고 고행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안식 대신 왠 고행? 고행이란 무엇인가?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 하고 노래한다. 따라서 고행(고난)이란 주의 책망을 받는 것이요, 고행을 하는 것은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 시인은 “(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하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의 말씀 앞에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한 세리의 자세가 고행의 적절한 예가 아닐까?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고후7:10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야 말로 성도가 적용해야 할 고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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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페북, 민수기 – 레위기와 병행본문]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부터는 축제다. 제물이 풍성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도 풍성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나팔소리로 시작한 일곱째 달은 초열흘이 속죄일이고 보름부터 이레동안 (총정리하는 여덟째 날을 포함하면 여드레 동안) 초막절이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렀다.

특이한 것은 이레동안 드리는 대표 제물 중 수송아지 숫자가 13, 12, 11, 10, 9, 8, 7로 매일 한마리씩 줄어든다. 총 70마리다. 히브리 수 7과 10은 완전과 통합 뭐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총 70 마리의 제물은 완전과 통합이 어우러진 거룩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수송아지 제물 수가 10을 중앙으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것에 대해 성경이 답을 주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나의 삶이 때로는 조금 넘치기도 하고 조금 부족할 수 있으나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용한다. 공동체적으로는 믿음이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는데 역시 거룩함이라는 같은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물 수가 적어도 7(일곱)이니 완전하고 제물 수가 13(열셋)이라도 7의 곱절이 되지 못하니 믿음이 강하다 하여도 크게 자랑할 것이 못된다. 하나님께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흠 없음’에 주목하신다.

결국 일반적인 날이나 절기나 매일의 삶이 흠없어야 한다. 그러나 흠이 없을 수 있으랴. 그래서 날마다 드리는 번제 (상번제)는 빠지지 않아야 한다.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민2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