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5:39-55

39-43 동족이 가난하여 종으로 팔려 왔어도 그를 종 부리듯 해서는 안 된다. 종이 아니라 품꾼, 임시 거주자처럼 함께 살아야 한다. 희년이 될 때까지 그에게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그가 자식들과 함께 자기 가족이 있는 조상에게서 받은 유산의 땅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종으로 팔려 온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의 품꾼이므로 그들을 종으로 팔 수 없다. 품꾼을 고되게 부려서도 안 된다. 너희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44-46 이방 사람을 종으로 사들일 수 있고,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 거주자의 자손이나 가족 가운데서 종을 사서 너희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너희는 너희 자손에게 종들을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있다. 그러나 너희의 동포 이스라엘 자손들끼지 서로 고되게 부려서는 안 된다.

47-52 동족이 가난하게 되어서 너희와 함께 거주하는 외국 사람 가운데 부자 사람에게 팔리면, 그의 친척 가운데 누군가가 값을 대신 치르고 그를 데려와야 한다. 물론 스스로 그 값을 치르고 나올 수도 있다. 돌려 줄 값은 희년이 될 때까지의 햇수를 고려한다. 희년까지 햇수가 많으면 남은 햇수만큼 내고 나와야 한다. 일한 기간만큼 이미 값의 일부를 치른 것으로 계산한다. 

53-55 주인은 종을 품꾼으로 해마다 고용해야 한다. 어떤 주인이라고 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 희년에 풀어줘야 한다고 심하게 부려서는 안 된다. 희년에 종은  자기만 아니라 자식들도 함께 풀려난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속한 품꾼이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나의 품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다.

////종이 아니라 품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셨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해도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친구 간에는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안다고 하셨다. 사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하고 제자들에게  처음에는 조건부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명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계명을 온전히 행하기도 전에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이유를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결국 예수와의 친구관계는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아니냐로 평가된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종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품꾼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다. 그래서 종으로 팔려왔어도 종이 아니라 품꾼으로 대해야 했다. 소유물이 아니라 동거인으로 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품꾼을 동등하게 대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이웃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 종이라고 엄하게 (심하게) 대하면 안 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행한 것이 엄한 행동이다. 성도는 일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를 엄하게 대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동료에게 엄하게 대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엄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매일 매일을 희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레위기 25:23-38

23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나그네이며 하나님과 임시로 동거하는 자일 뿐이다.

24-28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은 무를 수 있어야 한다. 친척 가운데서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의 일부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판 땅을 되돌려 살 때에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한 만큼 값을 빼고 그 나머지만 무르면 된다. 이렇게 무르고 나면 땅을 판 사람이 자기가 유산으로 분배 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한다. 땅을 판 사람이 되돌려 살 힘이 없을 때에는 희년이 될 때가 땅을 산 사람이 소유하지만, 희년이 되면 땅은 본래 임자에게 돌아간다. 땅을 판 사람은 희년에 가서야 유산으로 분배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

29-31 성 안에 있는 집을 팔았을 경우 한 해 안에는 언제든지 되돌려 살 수 있다. 집을 판 사람은 한 해 동안은 그것을 무를 수 있다. 한 해 안에 되돌려 사지 못하면 그 집은 산 사람의 소유가 되어 대대로 그 자손에게 넘어간다. 희년이 되어도 본래의 집 임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곽이 없는 마을에 지은 집은 토지와 같이 여겨 판 사람이 언제든지 무를 수 있고, 되돌려 살 힘이 없으면 희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희년에 본래의 임자가 다시 차지한다.

32-34 그러나 레위 사람은 집이 성읍안에 있는 집도 언제든지 다시 무를 수 있다. 무르지 않으면 희년에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아 간다. 레위 사람의 집은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 사람의 유산으로 준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 사람에게 딸린 땅도 영원히 레위 사람의 유산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

35-38 동족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 살알 갈 수 없는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대우해야 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겨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안다면, 너희의 동족을 너희의 곁에 데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주거나 먹거리를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임시로 하나님과 동거한다. 성도는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은 친척간에 서로 보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희년이 되어 다시 찾을 수 있다고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믿음의 형제자매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성도간에 서로 도와야 한다. 성도의 견인을 운운하며 방치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하고 권면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나라요,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편에 서는 나라다. 이 땅에서는 임시지만, 하늘에서는 영원하다. 

레위기 25:1-22

1-7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말씀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면 주님이 쉴 때에 땅도 쉬게 해야 한다. 여섯 해 동안은 씨를 뿌리고 포도원을 가꾸어 그 수확을 거두어도 일곱째 해에는 주님이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해야 한다. 일곱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 된다. 거둘 때 떨어져 저절로 자란 것들은 거두지 말아야 한다.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 이것이 땅의 안식년이다. 일곱째 해에 땅을 이렇게 쉬게 해야만 땅도 너희에게 (종들과 품꾼과 너와 함께 사는 나그네에게도) 먹거리를 내어 줄 것이다.

8-13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나면, 칠 년이 일곱번이면, 사십구 년이 된다. 일곱째 달 열흘 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너희는 오십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해,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해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려야 한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으로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다. 오십년이 시작되는 해를 너희는 희년으로 지켜라. 희년에는 씨를 뿌리지 말고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아라.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지 말아라. 그해는 희년이요, 너희는 희년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 너희는 밭에서 난 것을 먹게 될 것이다. 이렇게 희년이 되면 너희는 저마다 유산으로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14-19 이웃과 매매할 때, 부당하게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밭을 살 때에는 희년에서 몇해가 지났는지 계산해서 땅 값을 계산한다. 소출을 거둘 햇수가 많으면 더 많은 값을 치러야 하고, 햇수가 얼마 되지 않으면 값을 깎을 수 있다. 너희는 땅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거둘 수 있는 수확의 횟수를 매매하는 것이다. 너희는 서로 이웃에게서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세운 규례를 따라서 살고 내가 명한 법도를 지켜서 그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땅에서 너희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땅은 소출을 낼 것이고 그것으로 너희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20-22 일곱째 해에는 씨를 뿌려도 안 되고 소출을 거두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 그 해에는 무엇을 먹을까? 여섯째 해에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그 한 해에 나게 하겠다. 여덟째 해 곧 너희가 다시 씨를 뿌리는 그 해에도 너희는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다. 아홉째 해가 되어서 햇곡식이 날 때까지 너희는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다.

//희년! 자유! 이보다 더 벅찬 단어가 있을까? 희년이 되면 저마다 유산을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하고 노래할 때 ‘다시 새 힘을 주시고’에 사용된 단어가 ‘돌아가다’와 같다. 개역개정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 소생에 해당 된다. 희년은, 자유의 선포는 바로 영혼의 소생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실천할 수 있다. //땅은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거둘 수 있는 수확의 횟수만을 매매한다는 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부당한 이익을 남기지 말라고 하신다. 개역개정에서는 ‘속이지 말라’고 번역한다. 이웃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령한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어렵지만,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보이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눅4:18,19)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고 이사야의 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성도에게도 희년은 더이상 50년마다 돌아오는  특별한 해가 아니다. 하루 하루를 희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하신다. 이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은 없을 것이다.

레위기 24:1-23

1-4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셨다. 올리브에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서 그 등불을 늘 켜 두어라. 아론을 시켜 회막안 증거궤 앞에 쳐 있는 휘장 바깥에 그 등불을 켜 두어라.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 켜 둘어라. 자손 대대로 이 규례를 지켜라. 아론은 주 앞에서 순금 등잔대 위에 그 등불을 늘 켜 두어야 한다.

5-9 과자 열두 개를 구워 주의 앞 순금 상 위에 차려 놓아라. 안식일 마다 이 음식을 주 앞에 늘 차려 놓아야 한다. 이 제물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이다. 주께 바치는 제물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것으로, 제사장들은 이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길이 지켜야 할 규례다.

10-16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버지는 이집트 사람인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진에서 어떤 이스라엘 남자와 싸웠다. 이 아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저주하는 말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모세에게 끌고 왔다. 이 아들의 어머니는 슬로밋으로 단지파 디브리라는 사람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가두고 주님의 뜻을 기다렸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저주하는 말을 한 그 사람을 진 바깥으로 끌어내고, 저주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안수한 후, 온 회중에게 그를 돌로 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온 회중이 그들 돌로 쳐죽여야 한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사람이라도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17-23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짐승을 죽인 사람은 생명으로 생명을 갚아야 하므로 살아 있는 것으로 배상해야 한다.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입힌 만큼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혀라. 눈은 누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남의 짐승을 죽인 사람은 짐승으로 불어줘야 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과 외국사람에게 같이 적용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모세의 가르침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을 저주한 그 사람을 진 바깥으로 끌어 내어 돌로 쳐죽였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그대로 했다.

//이스라엘 진영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이집트 사람이니 외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이스라엘 사람이니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야하나?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면 에외 없이 절대로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주의 백성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은 결국 영이신 하나님을 죽이는 행동이다. 예수께서는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 받아도 성령을 거슬러서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은 용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벌도 사형이다. //빛가운데 거하고 거룩한 빵을 먹는 성도는 빛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를 따라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하며,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과 양식을 나눠야 한다. 시인(62)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이에는 이’라면 ‘사랑에는 사랑’이다. 

레위기 23:26-44

26-32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다. 이 날에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께 제물을 바쳐야 한다. 속죄일에도 하루 동안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일 대신 고행을 해야 한다. 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성에게서 끊어기제 해야 한다. 주님께서 고행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주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 버리겠다고 하신다. 어떤 일도 하지 말고 고행을 해라. 속죄일도 안식일이다. 9일 밤부터 시작하여 열흘날 저녁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33-38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달의 보름날부터 이레동안은 초막절이다. 초막절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초막절 이레 동안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고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가장 거룩한 모임으로 생업을 돕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명한 절기들이 다가올 때마다 주의 백성은 거룩한 모임을 열고 각종 제사를 드려야 한다. 주께서 명한 절기들도 안식일처럼 지켜야 한다.

39-44 밭에서 곡식을 거둔 후,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동안 지키는 초막절의 첫날과 여드렛째날도 안식하는 날이다. 해마다 초막절 이레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즐겨라. 자손 대대로 이 절기를 지켜야 한다. 이레 동안 너희는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본토 사람은 누구나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모세는 주님께서 명하신 여러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주었다.

//속죄일에는 생업을 돕는 일을 하지 말고 고행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안식 대신 왠 고행? 고행이란 무엇인가?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 하고 노래한다. 따라서 고행(고난)이란 주의 책망을 받는 것이요, 고행을 하는 것은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누가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 시인은 “(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하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의 말씀 앞에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한 세리의 자세가 고행의 적절한 예가 아닐까?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고후7:10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것이야 말로 성도가 적용해야 할 고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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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페북, 민수기 – 레위기와 병행본문]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부터는 축제다. 제물이 풍성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도 풍성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나팔소리로 시작한 일곱째 달은 초열흘이 속죄일이고 보름부터 이레동안 (총정리하는 여덟째 날을 포함하면 여드레 동안) 초막절이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렀다.

특이한 것은 이레동안 드리는 대표 제물 중 수송아지 숫자가 13, 12, 11, 10, 9, 8, 7로 매일 한마리씩 줄어든다. 총 70마리다. 히브리 수 7과 10은 완전과 통합 뭐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총 70 마리의 제물은 완전과 통합이 어우러진 거룩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수송아지 제물 수가 10을 중앙으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것에 대해 성경이 답을 주지는 않으나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나의 삶이 때로는 조금 넘치기도 하고 조금 부족할 수 있으나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용한다. 공동체적으로는 믿음이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는데 역시 거룩함이라는 같은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물 수가 적어도 7(일곱)이니 완전하고 제물 수가 13(열셋)이라도 7의 곱절이 되지 못하니 믿음이 강하다 하여도 크게 자랑할 것이 못된다. 하나님께서는 많고 적음이 아니라 ‘흠 없음’에 주목하신다.

결국 일반적인 날이나 절기나 매일의 삶이 흠없어야 한다. 그러나 흠이 없을 수 있으랴. 그래서 날마다 드리는 번제 (상번제)는 빠지지 않아야 한다.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민2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