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4:7-16 읽기

전도서 4:7-16 읽기

전도자는 세상에서 헛된 것을 또 보았다. 한 남자가 있는데 자식도 형제도 없다. 그런데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며 산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이 그의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즐기지 못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구를 위해 이 수고를 하는지 자문한다. 전도자는 이 남자의 수고도 헛되고 부질없다고 말한다.
혼자보다 둘이 더 낫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한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일으켜 줄 수 있다.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누가 일으켜 줄까?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할까?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그러니 둘보다는 셋이 더 낫다.)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신하의 직언을 듣지 않는 왕은 어리석다. 어리석은 왕보다 가난할지라도 슬기로운 젊은이가 더 낫다. (전도자는 슬기로움/지혜를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 한다. 한 나라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젊어서 감옥살이를 하다가도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 전도자가 보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왕이 아니라) 왕의 후계자가 된 젊은이를 따른다. 한 나라의 왕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끝이다. 어느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도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독불장군을 요구하지 않는다. 두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세상은 모두 일등을 향해 달린다. 전도자는 혼자만 달린다면 올림픽 금메달도 헛되고 부질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두세사람의 연합은 더 낫다. 더 낫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에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같은 단어다. 곧 두세사람의 연합은 창조질서에 합당한 삶이다. //어리석은 왕보다 가난할지라도 슬기로운 젊은이가 더 낫다. 전도자가 말하는 슬기로움은 지혜요, 지혜는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가난하게 태어어나서 왕이 되는 것보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좋다.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이 헛됨은 잠깐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영원이기 때문이다. ////창조질서, 창조목적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신다.

전도서 4:1-6 읽기

전도서 4:1-6 읽기

세상에는 온갖 업악이 일어난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이 폭력을 휘둘러도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ㅠㅠ
전도자는 아직 살아서 억눌리는 사람보다 이미 숨이 넘어가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억눌리는 사람, 억눌려서 죽은 사람들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못된 일을 못본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팔장을 끼고 수수방관하면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

//선의의 경쟁은 없다! 전도자의 말대로 경쟁을 통하여 온갖 노력과 성취가 이뤄졌다. 우리는 그 발전과 진보?만 보지 그 이면의 선의의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업악을 보지못한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은 편안함, 곧 안식과 거리가 오히려 멀다.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편리함을 추구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런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낫다라는 선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선의의 경쟁은 경쟁에서 이긴자가 진자를 위해 모든 보상을 내려놓을 때만 유효하다. 과연 해아래 이런 경쟁이 있었던가. 승자독식은 있어도 패자독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가신 길이다.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사랑이다.

전도서 3:16-22 읽기

전도서 3:16-22 읽기

세상에는 재판하는 곳,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도 악이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받을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호흡이 있는 것은 죽는다.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모든 모두 잠깐이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같은 곳으로 간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영은 올라가고 짐슴의 영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전도자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상의 보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몫이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일어나 죽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말해줄 사람은 없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우리 주님이 죽음 너머에 영생과 영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죽는다는 점에서 사람과 짐승은 다를게 없다. 유한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사람이라서 구원받고 짐승이라고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죽음에서 영원히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전도자는 모든 행위는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공(정)의가 있어야할 재판정에도 악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차별이 없을만큼 정의롭다. 성도는 이 마지막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곧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자족하면서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 어쩌면 짐승만도 못한 놈이 되고 만다.

전도서 3:1-15 읽기

전도서 3:1-15 읽기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살릴 때, 허물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통곡할 때와 기뻐 춤 출 때, (돌을) 흩을 때와 모을 때, 껴안을 때와 껴안는 것을 삼갈 때, 찾아 나설 때와 포기할 때, 간직할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말하지 않을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과 평화
사람이 애쓴다고 때를 바꿀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곧 때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한다. 전도자는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깨닫는다.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사람이 보탤 수도 뺄 수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있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 하신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시즌이 있다. 이것을 사람이 바꿀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정해진 때를 깨지 않으신다. 한결같으시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보태거나 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결같으시면서도 때를 따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 곧 때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고 깨닫는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이 하신 일의 시말을 다 깨닫지는 못한다. 그러니 자족하면서 선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라고 교훈한다. 이것이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때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주님이 우리를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때도 물론 있다. 성도라고 지름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결같으신 분이시다. 지금은 악한 때다. 세월을 아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좋은 일을,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해야한다. 이보다 더 좋은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없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전도서 2:18-26 읽기

전도서 2:18-26 읽기

전도자는 자신이 수고하여 이루어 놓은 것을 뒤에 올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을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뒤에 올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인지 어리석은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수고하고 지혜를 다해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니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애쓴 모든 수고에 실망한다. 재주는 곰이 부리는 데 돈은 왕서방이 받는 꼴이다. 그래서 슬기롭고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보람도 없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마음의 안식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먹과 마시고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작은) 보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고 즐기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수고에 수고를 더하게 하시며, 죄인이 모은 재산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신다. 그러니 죄인이 수고에 수고를 더해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수고한 보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자족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즐거워 한다. 정신적으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지 않고 자족한다. 곧 겸손이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알 것이니라.” 하고 디모데에게 교훈했다. 내가 무엇을 이루어 놓았다는 (놓겠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받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은 자족과 겸손으로 드러난다. 자족하고 겸손한 자가 누리는 것이 바로 영생이요 임마누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