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2

마태복음 2:1-12

예수께서 헤롯 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있느냐고 찾았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러 왔다고 말했다. 헤롯 왕도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에 태어나실지 물었다. 그들은 왕에게 예언자들의 기록을 보면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다.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묻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면 자기도 그에게 가서 경배하겠다고 말했다. 박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박사들은 별이 인도에 무척 기뻐하며 그집에 들어갔다. 그들은 아기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했다. 그리고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하나님은 꿈에 박사들에게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했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16/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전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하늘을 보지 않고 땅만 보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사건이다. 동방박사들처럼 전문적으로 하늘의 별을 연구하거나, 베들레헴 성 밖에서 양떼를 지키며 밤새 하늘의 별을 세던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 소식이 전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지 말씀을 보고 금방 알아냈던 종교지도자들도 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하여 달도 없는 밤 같이 깜깜했었다. 오늘날에는 일식과 월식도, 밤하늘의 신비한 현상을 뉴스에서 미리 예고해 주지만, 실제로 밤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은 적다. 이렇듯 땅에 있는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없다. 하늘을 봐야 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펴고 예수라는 별을 바라보자. 우리도 별을 따라가자.

마태복음 1:18-25

마태복음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약혼자인 마리아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예수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이 예언서 말씀의 성취라고 적는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났고,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옆으로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접한 요셉이 처한 두려움은, 천사를 통해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받은 두려움보다 더 컸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에게도 천사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요셉도 태몽을 꾼 것이다. 이렇게 파경을 맞을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는 구원받게 된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결국 구원의 열매는 임마누엘이다. 요셉과 마리아는 임마누엘을 누린 사람들이다. ////주님의 놀라운 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물론 결혼후에도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나누며 사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의롭다는 것은 말씀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평생 의로우셨다. 임마누엘이 그 원천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15/

마태복음 1:1-17

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엿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마태는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낳고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하고 아브라함의 족보에 마침표를 찍고 난 후,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하고 덧붙인다. 그러니깐 예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를 빌려? (아니 세상 족보에 속하지 않고) 이땅에 오셨다.
성경은 곳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셨다고 선언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언이니 다른 증거가 필요없다. 마찬가지로 성도도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그래서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하늘나라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땅의 아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성도 각자는 육신의 어머니는 다를 수 있어도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니 감사하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14/

민수기 10:11-36

민수기 10:11-36

출애굽 제 이년 둘째 달 이십 일에 성막에서 구름기둥이 비로소 걷혔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 기둥을 따라 시내 광야를 떠나 구름이 바란 광야에 머물 때까지 계속 행군하였다.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지시한 명령대로 구름 기둥을 따라 간 첫번째 행군이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유다 자손이 선두에, 뒤이어 잇사갈 자손 스블론 자손이 뒤따랐다. 그 다음에 성막 운반을 맡은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걷어 출발했다. 다음으로 르우벤 자손, 시므온 자손, 갓 자손 순서였다. 이어서 고핫 자손들이 성막의 기구들을 메고 출발했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은 고핫자손보다 먼저 도착해서 성막을 세워야 했다.) 그 뒤를 에브라임 자손, 므낫세 자손, 베냐민 자손이 따랐고, 마지막으로 단 자손, 아셀 자손, 납달리 자손이 뒤따랐다.
모세가 미디안 사람인 장인에게 약속의 땅에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잘 해주시는 대로 장인에게 잘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세의 장인은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가자고 한 번 더 간청했다. 광야 길을 잘 아는 장인이 길 안내자가 되어달라고 말했다. 장인이 함께 가기만 하면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나눠드리겠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기둥을 따라 사흘길을 갔다. 주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가면서 쉴 곳을 찾았다. 낮의 더운 열기를 주님은 구름을 덮어 식혀주셨다. 주님의 궤가 떠날 때 모세는 “주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십시오.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을 주님 앞에서 쫓으십시오” 하고 말했고, 주님의 궤가 쉴 때는 “주님, 수천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로 돌아오십시오” 하고 외쳤다.

//모세가 장인에게 길 안내자가 되어 함께 가자고 간청하는 장면을 어찌 봐야 할까? 주님께서 구름기둥으로 친히 인도하실 것인데… 모세의 불신일까? 장인을 꼬득이기 위해 그냥 한 말일까?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보장하는 주님의 좋은 것보다 고향 친척을 택했다. 잘못된 선택일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셨을까? //구름기둥을 따라 길을 가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구름 기둥이 구름 장막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덮어 한 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었음에도오죽했으면 언약궤를 앞세우고 구름 기둥을 따라 사흘 길을 가면서 쉴 곳을 찾았을까? //구름 기둥을 따른다 해도 광야는 대적들이 즐비한 곳이다. 주님을 앞세울 수 밖에 없는 길이다. 광야는 쉴 때도 주님을 찾아야 하는 곳이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은 주님이 앞장서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성도가 누리는 샬롬이다.

민수기 10:1-10

민수기 10:1-10

주님께서 모세에게 은나팔 둘을 두들려 만들라고 하셨다. 은나팔 둘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는 신호로 삼게 하셨다. [나팔 둘을 불면 온 회중이 회막 문에 나오고, 하나만 불면 천부장 된 지휘관들로 나오라고 하셨다.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두번째로 크게 불면 남쪽 진영들이 …] 은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어야 했다.
은나팔은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나갈 때도 불었다. 대적을 치러 나갈 때 나팔을 크게 불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기억하고 대적에게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다.
희락의 날과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7/03/17/

//은나팔은 공동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준다. 이 나팔은 제사장이 불어야 한다. 곧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섬기는 사람이 분다. 은나팔은 전쟁 때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분다. 하나님은 은나팔 소리를 들으시고 주님의 백성을 대적에게서 구원해 주신다. 오늘날에는 성령께서 은나팔을 대신하신다.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또한 하나님께 성도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분이 아니신가? 또한 성령의 검이야 말로 성도의 유일한 무기가 아닌가? 성령의 은나팔을 부시는 분은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제 성도는 은나팔의 코드를 잘 숙지해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 은나팔 코드는 성서 말씀이다. //은나팔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도구다. 우리에게는 더 좋은, 가장 좋은 보혜사 성령께서 친히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