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18-30
예수께서 귀 있는 자들에게 씨뿌리는 비유를 풀어주신다.
//씨뿌리는 사람은 과연 농부일까? 농부라면 씨를 아무곳에나 뿌리지 않을 것이다. 밭에 뿌려야 농부다. 그렇다면 마땅히 밭이었던 땅이 더러는 길이 되고, 더러는 돌짝밭이 되고 더러는 가시덤불이 된다는 설명이 더 합리적이다. 곧 수확을 거두는 땅만 좋은 땅이다. 씨가 뿌려질 때는 같은 밭이었지만, 좋은 땅인지는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 땅이 좋은 땅이다. 예수께서는 좋은 땅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악한자, 환난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곧 말씀을 마음에 두지 못한다면 결코 열매 맺는 좋은 땅이 될 수 없다. //땅만 좋아서는 안 된다. 좋은 씨를 뿌려야 한다. 마음이 좋다고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원수들은 좋은 땅에 나쁜 씨를 뿌린다. 악한 사람이 좋은 마음에 뿌려진 좋은 씨를 빼앗는 경우나, 환난이나 박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보다 더 나쁜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나쁜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지면 악한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가 좋아야 한다. 좋은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씨는 싹이 나서 자라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싹수가 노랗다고 이웃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땅에 가라지가 난다고 바로 뽑아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곡식이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비와 긍휼이 우선이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일은 씨뿌리는 자의 역할이 아니라 추수꾼의 역할이라고 하신다. (우선순위는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좋은 땅은 예수와 함께 함이다. 임마누엘이다. 비유의 해석이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이유다. 제자들은 물리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또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있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한다. 믿음의 여정의 마지막 단계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이다. 믿음의 초짜에게는 악한 자들이 훼방하고, 악한 자들 훼방을 이길 때쯤이면 환난이나 박해, 즉 어려운 환경이 믿음이 자라는 것을 훼방한다. 이것을 이겨내면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믿음의 성숙을 훼방한다. 이 훼방들을 통과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온전한 기쁨의 열매를 누리게 된다. 주변의 가라지에 핏대를 세울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로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