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34-42

마태복음 10:34-42

예수께서는 느닷없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부모 자식간에 고부간에 맞서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주님보다 부모나 자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신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이지만,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언자를 맞아들이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고, 의인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곧 주님을 맞아들이면 주님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주님의 제자로서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7/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집안 식구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으셨던가? 다만 주님보다 집안 사람을 ‘더’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집안 사람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집안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집안 사람들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제자를 맞아들이은 사람은 주님을 맞아 들이는 것이요, 나아가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집안 사람들에게 주님의 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가 집안 사람들을 지금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주님의 제자라면 집안 사람들을 사랑할뿐 아니라, 작은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작은 사람이란 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온정의 손길을 나눠야 한다. 제자의 이름이라고 해서 우리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옷입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받을 상을 받는 길이다. 주님과 같은 상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상은 없다.

마태복음 10:24-33

마태복음 10:24-33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청출어람이 있을 수 없다. 그래도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까지 자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이 바알세불의 이름을 빌러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아냥 거렸으니, 주님이 종된 제자들을 귀신의 종들이라고 얼마나 더 비방할까 하고 염려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들의 비난은 거짓된 것임이 들어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유로 (어두운데서, 귓속말로) 가르치셨으나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배운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외치라고 명령하셨다. 세상은 우리 몸을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몸도 영혼도 다 멸명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주님이시다. 참새의 생명이 주님께 달려있듯이, 참새보다 더 귀한 우리의 생명을 돌보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러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6/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여기서 ‘많다’는 단어는 앞 절의 머리카락처럼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많다’를 ‘모든’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어색하 않다. 그만큼 주님의 제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다. 그 이유는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죽으면 참새와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몸은 죽는다. 그러나 영혼까지 죽는 일이 없도록 ‘영혼’을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바람빠진 풍선처럼 될 수 있다. 어쩌면 성도는 바늘 구멍이 난 자동차 타이어다. 한동안은 잘 굴러다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구를 수 없을 때가 온다.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이유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이 성령충만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말과 혀로 만하는 시인은 소용이 없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마태복음 10:16-23

마태복음 10:16-23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라. 슬기와 순진이 만나야 한다. 계산에만 빠르면 순진할 수 없다. 순진하기만 하면 속기 쉽상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면서도 순진하고, 순진하면서도 슬기로울 수 있을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실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된다. 내가 말하지 않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니 슬기롭고 순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한 고을에서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인자가 온다는 뜻은 무엇을 가리킬까? 돌아가시기 전이니 재림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 곧 ‘인자’로 드러나신다는 뜻이 아닐까? 하늘 나라의 핵심은 인자이신 ‘예수’ 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말장난 같지만, 예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임마누엘이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니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이다. 이것만이 이 땅에서 끝까지 견디게 해 준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5/

마태복음 10:1-15

마태복음 10:1-15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열두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시게 하셨다. 열두제자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와 다대오 시몬 유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내보실 때에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샬롬’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며,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 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하고 지침을 주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4/

//우선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되돌아 오는 평화

마태복음 9:27-38

마태복음 9:27-38

예수께서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마태는 둘을 정말 좋아한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 가시자, 그들이 따라 들어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들은 “예, 주님”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지역에 퍼뜨렸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무리는 “이런 것은 이스라엘세서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놀랐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온갖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후,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3/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믿음대로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대로 된다는 뜻은 분명히 아니다. 내가 아는 예수의 능력대로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예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하시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 귀신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다.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목자로 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기도한다면, 우리 자신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초청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주님의 뜻을 듣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