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4-26

마태복음 9:14-26

요한 예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다고 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이 없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 찢어진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부대는 못쓰게 된다. 새포도주는 새가죽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 된다.” 하고 말씀하셨다.
지도자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다.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시자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장송곡을 부르며 떠들고 있었다. 예수께서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무리를 내보내신 다음에 예수께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이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2/

//지도자는 예수께서 손을 얹어 주시면 죽은 자기 딸이 살아 날 것을 믿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죽은 믿음이다. 지도자는 예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청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댔다. 믿은대로 행동을 한 것이다. 믿음은 사념이 아니다. 사변적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다. 순종이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가르침을 크게 비웃은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가 떠벌이는 믿음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ㅠㅠ

마태복음 9:1-13

마태복음 9:1-13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소리를 율법학자들이 듣고,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속으로 말했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하는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에 어느쪽이 더 말하기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셨다. 그는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리는 이 일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그곳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는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식사중에 많은 세리와 죄인이 오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오?”하고 따졌다. 이것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1/

//’집으로 가거라’ vs ‘나를 따라 오너라’ – 친구들의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중풍병자에게는 ‘침상을 거두어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는 세리 마태에게는 ‘나를 따라 오너라’ 부르셨다. 성도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특별한? 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말씀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없다. ‘가라’ 하시면 가면되고, ‘오라’ 하시면 오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저런 악한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도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를 보지 못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저들은 예수께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런 태도는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곧 순종의 삶을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글깨나 배운 마태가 이제 세관 장부 대신에 복음서를 쓰게 된것에 주목하자.

마태복음 8:23-34

마태복음 8:23-34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뒤엎일 위험에 빠졌다. 그때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믿음이 적은자들이라고 부르시며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놀랐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건너 가라다 사람들의 지역에 도착하셨다. 귀신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와 마주쳤다. 귀신들인 사람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사람들이 그들이 있 곳으로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와 마주치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신들을 돼지들 속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예수 간청했다. 예수께서 ‘가라’하고 명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돼지 떼가 모두 바다쪽 비탈을 내달아서 물 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읍내로 도망가서 이 모든 일을 알렸다.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31/

//믿음이 적은 자들. –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를 아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와 한 배를 탔다. 물리적으로는 함께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예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예수를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영생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성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셨는데, 제자들이 아직 예수를 알지 못했으니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요, 영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적은 것이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를 목격한 제자들의 믿음은 조금 늘었을 것이다. //갈릴리 건너편에 도착하신 예수는 귀신들린 사람이 나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공동묘지 길로 가셨다. 그곳에서 귀신들린 사람 둘과 (마태는 ‘둘’이라는 표현을 너무 좋아한다.) 마주쳤다. 귀신들은 예수가 누군지 알았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신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성자 하난님을 알고 있어도 하나님께 대적하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설 수 없으니, 임마누엘/영생을 누릴 수 없다. 귀신들은 예수 안에 거할 수 없으니 돼지 속에 거하기를 간청 것이다. 귀신들이 예수 안에 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만물 (풍랑)도 예수의 권위에 복종한다. 자연만물(돼지)도 귀신이 들면 죽느니 못하다. 사람만이 예수의 권위에 불순종하려고 하며, 사람만이 귀신이 들려서라도 이 땅에서 잘되려고 발버둥치며 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죄를 짓느니 차라리 연자맺돌을 목에 달고 스스로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은 줄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죄를 짓게 하는 신체의 일부를 뽑아버리거나 잘라버리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줄 모른다. ㅠㅠ ////사람들은 죽게 된 것을 걱정하고, 소유를 잃은 것을 염려한다. 우리는 죽이는 권세와 살리는 권세를 모두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샘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야 한다.

마태복음 8:14-22

마태복음 8:14-22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손에 손을 대시니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날이 저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예수께 데려왔고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병자들도 모두 고쳐주셨다. 마태는 이것이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리리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때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예수께서 그 율법학자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하고 대답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30/

//장모라는 단어는 신약에 몇번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람을 가르키는 경우는 베드로의 장모가 유일하다. 베드로의 장모가 베드로 때문에 아프기 전부터 예수님을 수종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베드로의 장모이기 전에 예수님을 따르며 수종든 많은 여인들 중의 한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역발상을 한다면 베드로의 회심에 장모의 역할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예수님은 치유에도 주도권을 가지셨다. 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다. 천국은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국을 이땅에서도 맛보는 삶이 제자의 삶이다. 한 서기관의 고백처럼 내가 따르겠다고 결심한다고 따를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제자의 삶은 이 땅에서는 거처가 없는 삶이다. 예수 안에 거처를 삼는 삶이다. 또 다른 제자의 바람처럼 이땅에서 상속을 받고자 하는 삶도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삶이다. 오히려 부모도 함께 하늘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는 길이다.

마태복음 8:1-13

마태복음 8:1-13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 나병환자라면 당연히 깨끗함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예수께서 원하는 것을 구했다.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깨끗함을 선포했고 나병환자는 그 즉시 나았다. 예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구약에서 요구하는 정결케 되는 의식을 행하라고 덧붙이셨다. //나병환자의 믿음 – 1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무리를 뚫고 예수 앞에 나아갔다. 2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구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아무도 나병환자가 예수께 나오는 것을 제지하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권위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나병환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구했다는 것도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대한 적용이 아닐까?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 하인의 중품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다. 예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답을 하자, 백부장이 한 말이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에게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 하셨고, 그 즉시 백부자의 하인이 나았다. //백부장의 믿음 – 1 이방인인데도 받아주신 믿음. 2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하인(이웃)의 필요를 구하는 믿음. 3 병도 예수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믿음 ///천국은 속인주의가 아니라 속지주의에 가깝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나님나라에 살아야) 천국백성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백성이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천국백성의 후손은 될 지 몰라도 천국백성은 아니다.


//나병환자와 백부장 -나병환자는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나 사회적 약자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부장은 혈통적으로는 이방인이었느나 기득권자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준으로 따지면 둘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들이야말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리에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를 따르고, 자비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이다. ////산상수훈은 산하실천으로 진행된다. 마태가 유대인들을 주 독자로 쓴 복음서에서 첫 병고침을 사회적 소외자인 나병환자와 백부장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 더 놀랍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