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12

마태복음 19:1-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말씀을 이용하시며, 결혼으로 그 둘이 한 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이때라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했다고 율법을 들먹였다. 예수께서는 모세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용했지만 본래 뜻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장가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선천적 고자든, 인위적 고자든,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되었든 타고난 자라야 장가가지 않고도 살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혼은 난제다. 예수께서 이혼 불가를 선언하신 같지만,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자,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라는 단서를 다셨다. 모세 때에도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음행한 아내는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아도 죽임을 당하는 게 마땅한 법이었으니,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잘못된 생각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혼이 난무하는 시대에 산다. 교회 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부부간에 서로 배우자의 음행을 이유로 이혼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상대방, 혹은 양자의 음행으로 이미 깨어진 가정을 이혼 없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용서’라는 맥락에서는 호세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지켜야 하는 것이 부부관계가 아닐까 한다. 폭력가정에서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부부관계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이혼을 정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혼을 정당화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의 인생에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하는 서약은 세례식과 혼례식 밖에 없지 않은가? +++++//제자들은 이혼은 본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돌연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독신은 (비혼이라고 해야 하나) 오직 타고난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신다. 태어날 때부터든 사람의 손으로든 아니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받으라고 하신다. 결혼이든 미혼이든 비혼이든 혼외성애(섹스)는 다 간음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고 권면했을까.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하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햐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라면 살면서 적어도 두번, 즉 세례식과 결혼식 때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한다. 이 서약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서약을 어기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세상에 화가 있고 서약을 어기는 사람에게도 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범죄하게 하는 신체 일부는 찍거나 빼어 버리면 되겠지만 음욕을 품는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되어야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마저 쉽지 않다. 음욕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더 많이 간직할 수 밖에.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