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11

마태복음 21:1-11

예수 일행은 에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오라고 하셨다. 누가 딴지를 걸거든 주가 쓰신다고 말하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하셨다. 이 역시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는 말씀의 성취라고 마태는 기록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에 따라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얹었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 무리들은 그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예수께서 가는 길에 폈다. 무리는 호산나로 함성을 지르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동에 놀라자,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서 온 선지자 예수의 등장을 알렸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6/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래도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했었는데)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잠시의 해프닝에 불과 했다. 온성이 소동했지만 왕의 행렬도 개선장군의 행렬도 아니었다.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겸손한 왕으로 오셨다지만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무리들은 무엇을 기대했을까? 임마누엘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의식중에라도 호가호위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주가 쓰신다고 말하면 즉시 보내줄 수 사람. 이 사람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예수를 물리적으로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마음 속에 담고 있었고, 말씀에 순종했으니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수와 동행한 (따르는) 사람이었다. 예수의 사람은 제도권에만 있지 않다. 제도권 안에 머문다고 다가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가 아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순종해야 예수를 따르는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