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3-30

마태복음 19:13-30

하늘 나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을 NO KIDS 구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라고 하셨다. 덧붙여 (다시 한번) 천국은 이런 사람, 곧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기도(축복)해 주셨다. //하늘나라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낮은 자들의 것이다. 낮고 작은 자들을 환영하는 곳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열린 곳이다. 교회는 정결한 곳이 아니라 이렇게 낮은 자들을 환영하는 곳이어야 한다.

한 청년이 예수께 나아왔다. 그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예수께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어린 아이들이 그져 안기고 축복받는 피동적이라면, 젊은이는 뭘 할지 묻는 능동적이다. 주도권을 예수님에게 두지 않고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선한 일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바로잡으셨다.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 한 분이시니, 아버지의 계명,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이며, 영생(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대답하셨다. 청년은 아버지의 계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재차 물었고, 예수께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들을 언급하셨다. 청년은 옳다구나, 자신은 이런 계명을 지키고 있는데 무엇이 더 부족한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한다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 나눠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예수를 떠나갔다.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야 한다. 곧 선한 일은 예수를 따르는데 필수과정이다. 물론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지,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하는 일은 아니다.

마태는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를 떠난 이유를, 그 청년이 부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하신 말씀을 덧붙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낙타든 굵은 밧줄이든 바늘귀를 통과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제자들의 반응은 마땅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있을까? 예수께서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못박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낙타를 바늘귀로 통과시키실 수 있으며, 당연히 부자도 천국에 들어오게 하실 수 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도 그랬다. 아버지, 곧 이 땅에서의 상속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으니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얻게 되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할 때, 함께 심판하게 될 것이라 답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듯이, 성도도 예수와 하나가 된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은 버린 것보다 몇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큰 자가 작아지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고 하신다.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크고 작고의 서열이 없다. 모두 영생을 상속받는다. 예수를 따른다. 임마누엘을 누린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3/

마태복음 19:1-12

마태복음 19:1-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창세기 말씀을 이용하시며, 결혼으로 그 둘이 한 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대답하셨다. (이때라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명했다고 율법을 들먹였다. 예수께서는 모세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용했지만 본래 뜻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장가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장가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선천적 고자든, 인위적 고자든,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되었든 타고난 자라야 장가가지 않고도 살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혼은 난제다. 예수께서 이혼 불가를 선언하신 같지만,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자,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라는 단서를 다셨다. 모세 때에도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음행한 아내는 이혼증서를 써주지 않아도 죽임을 당하는 게 마땅한 법이었으니,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잘못된 생각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혼이 난무하는 시대에 산다. 교회 안이라고 다르지 않다. 부부간에 서로 배우자의 음행을 이유로 이혼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상대방, 혹은 양자의 음행으로 이미 깨어진 가정을 이혼 없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용서’라는 맥락에서는 호세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지켜야 하는 것이 부부관계가 아닐까 한다. 폭력가정에서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부부관계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이혼을 정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혼을 정당화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의 인생에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하는 서약은 세례식과 혼례식 밖에 없지 않은가? +++++//제자들은 이혼은 본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돌연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독신은 (비혼이라고 해야 하나) 오직 타고난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신다. 태어날 때부터든 사람의 손으로든 아니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받으라고 하신다. 결혼이든 미혼이든 비혼이든 혼외성애(섹스)는 다 간음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고 권면했을까.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하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햐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라면 살면서 적어도 두번, 즉 세례식과 결혼식 때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한다. 이 서약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서약을 어기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세상에 화가 있고 서약을 어기는 사람에게도 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범죄하게 하는 신체 일부는 찍거나 빼어 버리면 되겠지만 음욕을 품는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되어야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마저 쉽지 않다. 음욕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더 많이 간직할 수 밖에.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2/

마태복음 18:21-35

마태복음 18:21-35

//형제가 죄를 범해도 짤라내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베드로가 도대체 몇번까지 용서하면 될지 묻는다. 일곱번이면 족하냐고. 예수께서는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형제를 짤라 내버릴 권한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도끼는 아버지 하나님만 휘두르신다. 우리는 잃어버리 자들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의 중보처럼 열매를 맺도록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결산할 때 짤려 버려질 사람이 있다고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의 비유를 이야기를 하신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요, 우리 이웃들은기껏해야 벡데나리온 빚진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늘 아버지께 용서를 받는다. //예수께서는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묻힌 밭을 사고, 값비싼 진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자의 비유에서도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야 갚으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자기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답은 너무나 뻔한데 일상에서도 용서가 힘드니 원~~. ㅠㅠ 그러나 용서하지 아니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 +++++//정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일만 달라트를 빚진 자도 용서하시지만 악한 자는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비유다. 하나님나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악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다. 잘 읽어보면 악한 종이 주인의 심판을 받은 것은 다른 동료들이 악한 종을 주인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악한 종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은) 다른 동료들의 용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용서의 나라다. 용서야 말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기도는 은밀하지만 용서의 삶은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천국문을 여는 열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1/

마태복음 18:11-20

마태복음 18:11-20

//잃은 양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다. 경제적으로 아흔아홉 마리가 백배 가까이 더 크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잃은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한 마리가 경제적으로 더 가치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잃은 것을 찾았기 때문이요, 아흔아홉에 하나가 더해져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잃었다’ 라는 단어는 범죄하게 하는 신체의 일부를 ‘내버리다’ 라는 단어와 같다. 그렇다면 잃은 양을 찾았다는 것은 빼버리거나 잘라버려야 할 신체의 일부를 도로 찾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범죄한 형제를 대하는 방법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형제가 범죄하거든 이렇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형제를 잃어버릴, 찍어내버려야 할 경우가 생기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 권면해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두세 사람과 함께 타일러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차원에서 말을 해야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신다. //교회(공동체)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충격이다! (실족케 하는 사람에게는 연자 맺돌 목에 달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으라고 하셨는데) 실족당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찍어버리라고 하지 않으신다. 원수라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해야 하듯이, 가라지를 미리 뽑지 않듯, 이방인과 세리와도 친구가 되라고 명령하시는 것 같다. //교회공동체가 매고푸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임마누엘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해야하는 일이 바로 잃은 양을 찾는 것이다.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은 잃어버린 양과 같다. 찍어 내버려야 할 지체가 아니라 도로 찾아야 할 지체다. 찍어버리는 도끼는 오직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 우리가 휘둘러야 할 기도는 잃은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한 기도여야 한다.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이요 하나님의 나라다.

////18절의 말씀은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다. [예수님은 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천국 열쇠란 무엇인가? 어렵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이듯이 베드로 또한 천국에서 세례요한만큼 작은 자라는 의미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천국문 앞에서 마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세를 했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라고 책망을 하신다. (마2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열쇠가 없었다. 천국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열쇠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천국 열쇠를 담당하는 자로 살 것이다. 결국은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이다. 그러니 열쇠를 받았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닫는 일이 권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번에는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두 사람에게도 (여기서 무엇이든지는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로 한 것을 의미한다) 천국열쇠를 주신다고 하신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바로 그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선언하신다. 임마누엘이다. 16장 묵상을 확인시켜 주신다.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열쇠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임마누엘임을 보여줄 때 천국문이 열린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20/

마태복음 18:1-10

마태복음 18:1-10

천국에서 누가 큰지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돌이켜 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다. 또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신다. 손이나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려서 장인이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신다.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그러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다고 하신다. 곧 그들에게는 중보자가 있다.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다. 차라리 어린 아이와 같이 아무런 권리도 없는 자가 큰 자다. 내 생명보다 어린 아이를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귀하다. 그래서 어린 아이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물에 빠져 죽으라고까지 말씀하신다. 내 생명보다 공동체가 중요하다. 마치 신체의 일부가 스스로를 범죄하게 한다면, 그 신체 일부를 가지고 망하는 것보다 내버리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 나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잘라 내버려야 할 것은 약한 지체가 아니라, 약한 지체를 돌보지 않는 강한 지체다. 약한 지체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약한 지체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범죄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 약한 자는 복이 있다. 이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보고 있는 중보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다. 천사보다 더 크신 중보자다.) 천사(중보자)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야말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누리는 셈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큰 자인가?’ 였는데 예수님은 ‘작은 자’가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미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다시 말해 천국에서는 모두 큰 자다. 아니 더 크고 더 작고는 의미가 없는 곳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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