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4-27

마태복음 17:14-27

예수와 세 제자가 높은(변화) 산에서 내려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는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다. 자기 아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그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하시며) 그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아이를 데려오자, 예수께서 꾸짖으시미 귀신이 나가고 아이는 나았다.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물었다. 예수께서는 남아 있던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다. 만일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못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갈릴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을 또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매우 근심했다. 가버나움에서 반 세겔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너희 선생은 왜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내실 것이라고 답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의 아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실족할 수 있으므로, 갈릴리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다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자신과 베드로를 위해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28/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라고 앞에서도 묵상했다.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칠십인 추수꾼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남아 있던 제자들이 주의 이름에 의지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능을 의지 했다고 할 수 있다. 마가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답을 포함시킨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발휘된다. 임마누엘이다. //진정한 임마누엘은 주님의 권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아버지와 사귀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신용카드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한다면 거부된다. 신용카드에 문제 있어서가 아니라 카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름으로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적절한 예는 아니겠지만 기도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부모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부모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종교세 논란도 잠잠케 한다.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종교세를 내야한다. 마지 못해서라도 내야 한다. 핵심은 면제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도 내야한다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의 의무에 동참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다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들이랴.

마태복음 17:1-13

마태복음 17:1-13

엿새 뒤, 일주일이 아직 안 지났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각오로 예수를 따르라는 가르침이 여전히 생생할 때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했다.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의 대화했다.
베드로가 예수께 이렇게 있는 것이 좋으니, 원하시면 선생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지어 모시겠다고 말했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를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은 구름속에서 나는 말을 듣고서 몹시 두려워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세 제자에게 인자가 부활할 때까지는 산 위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세 제자는 율법학자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확실히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하시면서,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인자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 깨달았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27

//부활이란 무엇인가? 예수와 더불어 대화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세 제자에게 보여 주신다.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되는 형상의 변화보다 죽은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죽은 자들을 대표하지 않을까) 예수와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기도 전에,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함이 마냥 좋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입을 놀렸다. 이번에는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베드로의 입을 막고, 베드로에게 예수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했다. 부활의 영광은 고난과 죽음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도달한다. 그래도 목자되신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다.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산 위에서 엘리야를 보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들은 율법학자들이 메시야보다 엘리야가 먼저와야 한다고 한 말도 기억하고 그게 무슨 뜻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의 대답에 먼저 와야할 엘리야 (선지자)가 세례자 요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예수 밖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삶이다” 하고 정의할 순 없을까? …. …. ….

마태복음 16:21-28

마태복음 16:21-28

제자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예수께 따졌다.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거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고 호통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도에 대해 말씀 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제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예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영생을 찾을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사람이 또 제 목숨을 되찾기 위해 대가로 내놓을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고난과 죽임이라는 단어에 꽂혔지만, 예수께서는 인자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을 거느리고 심판자로 오셔서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라고 밝힌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26/

//예수님보다 앞 서려고 하는 것이 사탄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자신의 뒤에 서라고 호통치신다. 베드로가 사탄을 따라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부인하고 각자에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성도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예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이 오히려 영생을 찾을 것이라고 교훈하신다. //마지막 28 절은 난해하다. 예수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아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순교를 면한다는 뜻이 강하다.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예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본다는 의미라고 유추해 본다. //우리의 믿음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 때, 그 행실 대로 갚아주시는 주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이 이미 영생(죽음을 맛보지 않는 삶) 이다. 물론 유한한 이 땅에서는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예수의 다스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마태복음 15:21-39

마태복음 15:21-39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신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예루살렘에서 지리적으로 더 멀어졌다. 아예 이방 땅으로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그 가나안 여자에게 한 마디 대꾸도 않으셨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께 그 여자를 안심시켜 떠나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재차 간청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세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낳았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을 떠나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니, 많은 무리가 온갖 아픈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들을 고쳐주셨다.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무리들이 함께 있은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먹 것이 없으니 가엾다고 하시며,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그곳이 빈들이라 무리를 배불리 먹일 음식을 구할 수 없다고 반응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빵이 몇개 있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마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앉히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찼다. 먹은 사람이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예수께서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 배를 타시고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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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피하시려고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지도 모르나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사람의 계명을 따르는 유대교의 전통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성자 예수님의 적극적인 순종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방 여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을 메시야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불렀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으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한다. 딸이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의 왕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방지역까지 발걸음을 옮기신 예수님의 반응은 더디다. 갈릴리 반대편에서 즉시 즉시 즉시 응답하셨던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에게는 먼저 침묵으로 응답하셨다. 시끄러운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를 보낼까요? 라고 묻자 그제서야 대답하시는데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답하신다. 마치 이방인들을 아랑곳 않는 태도시다. 그러나 끈질긴 가나안 여자는 결국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제 딸을 도와달라고 해야하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닌 자신의 처지를 도와 달라는 것처럼 간청한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셨다. 이에 가나안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자의 대답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답하셨고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 큰 믿음으로 가나안 여자는 참이스라엘인이 되었다.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이 믿음이 그 여자의 딸을 낫게 했다. 결국 큰 믿음이란 나는 전적으로 무능함을 인정하고 대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에 올라가 앉으셔서 따르는 무리를 고쳐주셨다. 말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게 되었다. 치유의 현장에서 무리는 놀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굳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고 적은 것을 보아 여전히 이방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칠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신다. 오병이어 표적을 보이실 때는 무리가 모인 그날 저녁에 표적을 보이셨는데 이번에는 삼일째야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보이셨다.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위한 복음서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천국 복음이 유대인에게 국한된 복음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듯 하다. ‘즉시’가 아니라 더딘듯 해도 천국 복음은 이방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마태복음 15:-20

마태복음 15:-20

예루살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왜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느냐고 물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은 전통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고 지적하셨다. 고르반을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전통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은 해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사람의 훈계를 교리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한다고 지적하셨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가까이 부르셔서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분개한다고 전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시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내버려 두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도 눈 먼 사람을 인도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뱃속으로 들어가 배설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풀이해주셨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하고 풀이해주셨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 엣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능히 스승이 될 만하다. 예수가 이랬다. 익숙한 옛것(율법)을 새것(사랑)으로 완성하신 스승이시다. 그런데 당시 선생으로 자처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옛것(전통)에만 매여있었다. 그러니 스승이 될 자격이 이미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옛것(율법)을 익혀 새것(사랑)이 아닌 ‘악’을 가르치는 줄 몰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이라고 지적하신다. 사람의 교훈이 난무하는 시대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어야(읽어야) 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을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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