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14-29

민수기 20:14-29

광야 사십 년이 흘렀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형제애를 내세워 이스라엘이 에돔을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돔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이스라엘이 에돔 땅에 들어온다면 칼을 들고 싸우겠다고 대답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한 번 더 에돔 왕에게 통행료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에돔 왕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장하고 이스라엘을 맞으러 나왔다. 이스라엘은 에돔을 우회해서 가나안으로 가야했다.
이스라엘 회중이 가데스를 출발하여 호르산에 이르렀다. 주님은 아론이 므리바 샘에서의 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가, 아론의 옷을 벗겨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하셨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했다. 아론은 호르산 꼭대기에서 죽었고, 모세와 엘르아살은 산에서 내려왔다. 아론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삼십일 동안 아론을 애도하였다.

//약속의 땅을 향하는 대로는 없다. 에돔이 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형제(애서와 야곱)라는 형제애에 호소하고, 급기야 비용까지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에돔은 오히려 싸우겠다고 나왔다. 주님은 약속의 대로를 막아선 에돔을 치시는 대신 우회의 길로 인도하신다. – 지름길은 내 뜻인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우회로를 제시하신다. 내 고집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내 뜻을 위해 싸워주시지 않는다. 내가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대신 싸워주신다. //가데스에서 호르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옷을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셨다. 옷을 벗은 (아마도 대제사장 옷) 아론은 죽었다. 어떻게 죽었을까? 모세와 엘르아살은 부정했다가 정결해지는 예식을 행했을까? 주님께서 그 영혼을 받으셨을 것이다. 아론의 대제사장 옷을 아들 엘르아살이 입었다. 자연스럽게 제사장직이 ‘세습’되었다. – 옷. 성도는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들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찰을 단 교회라는 학교의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다. 입은 옷에 합당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교회가 욕을 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을 받는다. 한편으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옷입어 그 옷에 합당하게 산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17/07/26/

민수기 20:1-13

민수기 20:1-13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미리암이 죽어 그곳에 묻혔다. 회중에게는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비방하려고 모였다. 그들은 모세에게 자신들도 동족이 죽었을 때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 했다고 말하며, 왜 이 광야로 자신들을 끌고 와서 죽게하는지 따졌다. 왜 고약한 광야, 농사질 수도, 마실 물도 없는 광야로 데리고 왔는지 항의했다.
모세와 아론은 회중을 떠나 회막 입구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나타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팡이를 잡아라. 너와 너의 형 아론은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에게 명령하여라. 그러면 그 바위가 그 속에 있는 물을 흘릴 것이다. 너는 바위에서 물을 내어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시게 하여라.]
모세는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지팡이를 잡았다. 모세와 아론은 회중을 불러 모았다. 모세는 회중을 향해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마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 하고 말하며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 그랬더니 많은 물이 솟아 나왔고,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바위에서 물을 내신 므리바 샘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과 다투었지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룩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므리바에서 모세는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모세에 대한 주님의 냉정한 평가다. 주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바위에게 말로 명령하면 될 것을 지팡이로 두번 내리쳤다. 아이들을 말로 타이르면 될 것을 꼭 회초리를 들어 때린 꼴이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답이 있다. 주님은 불평하는 (주님과 다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진노하지 않으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어 먹이셨다. 그런데 모세는 주님 대신 화를 냈다. 마치 주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화는 (주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다. 화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생기기 때문이다. 모세는 주님께서 친히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하고 하신 이 말씀을 의지하고 불평과 원망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말씀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 성도는 주님 대신 화를 내면 안 된다. 의분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지도자라면 더욱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비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

https://quietwaters.blog/2017/07/25/

민수기 19:11-22

민수기 19:11-22

시체에 닿은 사람은 이레동안 부정하다. 그래서 사흘째와 이레째에 붉은 암송아지를 불사른 재를 탄 물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정하게 된다. 사흘째와 이레째에 자기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부정하다. 부정한 사람은 주의 성막을 더럽히는 사람이다. 성막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스라엘 자손에서 끊어져야 한다.
시체에 닿지 않아도, 사람이 집 안에서 죽으면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도, 그 집 안에 들어가는 사람도 모두 이레동안 부정하게 된다. 들판에서는 시체와 무덤에 닿은 사람이 이레동안 부정하다. 이렇게 부정하게 되었을 때 붉은 암송아지 재를 떠다가 생수를 부어 죄를 씻는 물을 만든다. 정한 사람이 우슬초 가져와 그것으로 죄를 씻는 물을 찍어 집과 집안의 모든 기구위에,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위에, 시체와 무덤에 닿은 사람 위에 뿌린다. 정한 사람 사흘째 되는 날과 이레째 되는 날에 부정한 사람에게 이 잿물을 뿌려주면, 이레째 되는 날 부정을 탄 사람은 정하게 된다. 그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저녁이 되면 정하게 된다. 부정을 씻어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총회에서 제명된다. 주의 성소를 더럽히기 때문이다.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린 사람도 자기 옷을 빨아야 하고, 정결케 하는 물에 몸이 닿아도 그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부정한 사람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며, 부정한 것에 닿은 사람도 저녁때까지 부정하다.

//흠 없는 온전한 붉은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암송아지를 불사르고 남은 재는 부정한 사람(회중)을 정결케 하는데 사용된다. 대표적인 부정함이 죽음이요, 죽음을 대표하는 시체와의 접촉이다. 집 안에서는 시체와 접촉하지 않아도, 함께 있어도 부정하게 된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재삼일과 칠일에 잿물을 뿌려 정결케 한다. 한 번으로 부족해서 두 번 잿물을 뿌리는 모양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부정한 상태로 남아있고, 주님은 부정한 것과 함께 하실 수 없으시기에, 부정한 사람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끊으신다. 이것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다.
//잿물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지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결예식에 순종한다는 것은 의미 있다. 정결코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된다. 부정을 씻어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주의 성소를 더럽히기 때문에 총회에서 제명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불순종한 삶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명 된다. 영생이 아니라 영벌이다.
//부정한 사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잿물을 뿌려주는 정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 정한 사람은 자신이 저녁때까지 부정해지는 것을 감수하고 부정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잿물을 뿌려야하기 때문이다. 정결케 하는 물에 닿아도 저녁때까지 부정하니, 잿물에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잿물을 뿌리는 사람은 이레동안 부정하지 않다. 그날 저녁까지면 족하다.
//부정한 사람이 만진 것은 부정하고, 부정한 것을 만진 사람도 부정하다. 그러나 정한 사람이 만진 것은 정해지고 정한 것을 만진 사람도 정해진다는 것을 예수께서 보여주셨다. 정한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만져 주셨다. 정한 예수를 만진 사람도 나음을 입었다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증거다. 성도는 부정한 것을 피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부정한 것을 정한 것으로 바꾸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잠시 부정해짐으로 영원히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정하게 해야 한다. 내가 정하자고 부정을 멀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저버리는 자세라고 생각된다.

https://quietwaters.blog/2017/07/24/

민수기 19:1-10

민수기 19:1-10

흠 없는 온전한 붉은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암송아지를 불사르고 남은 재를 만들어 보관하라고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이 암송아지의 재는 이스라엘 자손 회중이 죄를 속하려 할 때에, 부정을 씻어내는 물에 타서 쓸 것이니 진 바깥 정결한 곳에 잘 보관하라고 하셨다.

//부정을 씻기 위한 재를 만들기 위해서, 제사장과 일꾼들은 수고 후에 옷을 빨고 몸을 씻었어도 잠시나마 (저녁까지) 부정해져야 했다. 이스라엘 회중의 속죄에는 이들이 잠시 부정해지는 희생?이 따랐다. 우리의 속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성자 예수께서 잠시나마 음부에 내려가셔야 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하나님의 나라이니 하나님과의 단절보다 더 큰 희생은 없을 것이다. //암송아지의 재를 진 바깥 정결한 곳에 잘 보관하라고 명하셨다. 음~. 진밖에 정결한 곳이 있던가? 부정한 자들을 진 밖으로 내쫓지 않던가? 미리암도 진밖에 이레동안 갇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밖 정결한 곳에 재를 보관하라고 하시니…. 진밖 어딜까? 하여간 진밖이라도 모든 곳이 부정하지는 않다는 뜻이니, 정하고 부정하고는 물리적 구분이 아니다. 진 밖에도 정결한 곳, 거룩한 곳이 있다. 세상에서도 성도가 밟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주님이 하늘나라에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듯이,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곳이 거룩한 곳이다.

민수기 18:21-32

민수기 18:21-32

주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바친 제물과 첫태생을 주셨다면, 그외 레위 자손들에게는 이스라엘 자손이 바친 열의 하나를 유산으로 주신다. 이렇게 레위 자손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회막일을 거들 수 있었다. 다른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에 접근해서도 안 되었다. 회막일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주님은 레위 자손에게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바치는 열의 하나가 그들의 유산이며,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레위 사람도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은 열의 하나의 열째 몫을 주님께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생업에서 얻은 소득의 열의 하나를 주님께 바치듯, 그들이 받은 열의 하나에서 열째 몫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이때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부분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제물은 제사장 몫이 된다.)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부분을 드리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신다. 제물을 더럽히지 않아야, 곧 제물을 드리는 규례를 어기지 않아야 죽지 않는다.

//열의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도 열째 몫은 주님께 드려야 한다. 그것도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것으로. – 나는 열의 하나로 먹고 살았다. 엠이라고 지난 삼십년 가까이 교회와 성도의 후원으로 살았다. 엠으로 나가기 전에 생업으로 5년 조금 더, 그리고 귀국해서 생업에 복귀한지 2년 조금 더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며 살았지만 부족하지 않게 살았다. 아니 넘쳐서 열번째 몫이 아니라 예닐곱째 몫부터라도 나누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전부를 드려야 하는데 겨우 남은 것으로 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엠이지만 목회자는 아니었으니, 아론 가문처럼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일반 레위 사람에 가깝다. 회막 일을 돕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차라리 느디님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다. 그래도 제사장과 레위 자손과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유산이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 나의 유산이다. 주님은 말씀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방법도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다. 자녀 셋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다. 셋 모두 자기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 남아있다. 이 땅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임마누엘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고 가장 거룩한 것을, 곧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이것이 정결한 삶이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하니 다행이다. 지금까지는 나와 아내가 아이들을 끌어주었다면, 앞으로는 아이들이 우리를 밀어주었으면 좋겠다. 믿음의 결승선을 함께 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