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8:16-31

(2017-08-10)

민 28:16-31

머리에 쏙 들어 오지 않는 것은 제사 뿐만아니라 절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키고 있지 않아서다. 부활절, 성탄절이 아니어서다.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절기들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사건과 연관이 있어 그래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유월절은 한마디로 문설주 피를 바름으로 장자들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무교절은 출애굽의 고생?을 기억하는 7일간의 명절이다. 칠칠절은 쉽게 유월절 이튿날부터 (무교절부터) 49일째 되는 날로, 유월절부터는 오순절이 된다. 칠칠절은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로도 불린다. 애고.

매일 아침 저녁을, 일주일에 안식일을, 한달에 초하루를 구별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듯이 오늘 본문은 일년에 며칠 몇 날을 절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어느 절기에서 날마다 드리는 번제 (상번제)를 드려야 했다. 결국 매일매일의 삶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26] 절기로 모이는 것에는 감사와 예배와 쉼의 원리가 들어있다. 칠칠절은 추수에 대한 감사. 성회로 모이는 예배,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쉼.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흠 없는 것으로

사면초가

(2017-10-27)

사면초가 2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항우는 마지막임을 알고 부인 우희에게 ‘해하가’를 지어부른다.

산을 옮길 힘이 있고 세상을 덮을 기운이 있지만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항우의 애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 우희여 우희여 어찌할꼬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항우의 마지막은 평생의 여인 우희에 대한 염려였을까? 아니면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을까? 어찌할꼬 묻는다. 하여간 항우의 ‘해하가’에 우희 (우미인)은 ‘화항왕가’를 지어 답했다.

한나라 군인이 이미 땅을 침략해서 / 사방에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리네 / 대왕의 힘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 천한 첩이 어찌 살리요

우희는 답시를 다 부르고 칼로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다.

예레미야 심정에서 우희를 발견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앞에 사면 초가의 상황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상은 예레미야가 패역한 백성들의 조롱에 사면초가가 된 것이다.[10] 심지어 친구들까지 저들 편에 섰다. 오직하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좌절의 심정을 토해낼까? ‘어찌 살리요’ 항우나 우희보다 예레미아의 상황이 더 심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해야 하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참고 인내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 부끄러움이라는 조소를 [렘 20:18]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국도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후4:8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길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도 부끄러움을 너머 면류관을 본다.

나도 하나님을 바라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

두 아들

(2019-03-28)

예수님은 권위를 두아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가신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라는 지위에 (혹은 신분에) 있지 않다. 아들이 순종할 때 권위가 있다. 불순종할 때는 아버지라는 지위는 있어도 권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런데 이 뜻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신다. 권위는 권위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바로 권위자에 대한 이 믿음이 없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시는것 같지만 실상은 세례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왔음을 믿었다고 하신다. 이들은 작은 자들이다. 작은 자들이 믿은 것을 보고 큰 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뉘우치고 믿었어야 했는데 어리석음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자들인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다. 여전히 나중에 들어갈 기회가 있는 듯 보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았다.

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57-66

날이 저물었다.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부자가 왔다. 그도 예수의 제자다. 그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고, 빌라도는 허락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삼베로 싸서 바위를 뚫어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셨다. 그리고 무덤 어귀를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이 무덤까지 와서 지켜보았다.
다음날, 곧 예비일 다음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가 사흘후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으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 무덤을 단단히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간 후 백성에게 부활했다고 거짓으로 말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내줄 테니 물러가서 재줏껏 지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막은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을 두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 그는 부자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했는데, 요셉은 예수의 제자 되었다. 그는 힘들다는 좁은 문을 통과했다. 예수와 함께 다닌 기록은 없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총독 앞에 나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할 정도로 제자의 자격을 갖췄다. 그리고 기꺼이 자기 묘자리를 예수께 내드렸다. (묘자리는 상속할 수 없는 자기가 가진 마지막 것을 상징하지 않는가?) 하여간 부활신앙을 가진 자만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두 마리아 – 두 여인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거둔 곳까지 따라가서 지켜보았다.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든 이들의 시선은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았다. 끝까지 예수를 따라가며 푯대를 바라 봤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내실 수 밖에 없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거짓 부활이 신경쓰였다. 사실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예수의 진짜 부활이 아니었을까? 진짜로 부활하신 예수 앞에 그들이 어떻게 설 수 있을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확실히 부정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거짓으로 부활을 전파할까봐 걱정했다. 부활논쟁에서 예수 앞에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기뻐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부활을 진짜로 믿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들이 부활을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공권력을 빌어서라도 무덤을 봉하고 봉하고 또 봉했다. 그러나 부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땅의 시공간 너머의 사건이다. (빌라도는 뭘 알고서 재줏껏 지키라고 말했을까?) 분명한 것은 영원에 잇대어 사는우리 성도는 이미 부활에 참여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