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1:16-35

민수기 11:16-35

(읽기)
주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장로/지도자 일흔명을 주 앞으로 소집하라고하셨다. 주께서 회막에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 주께서 모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영을, 장로/ 지도자들에게도 나눠 주어서 모세와 함께 백성을 돌보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더 이상 모세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하셨다.
주께서 모세에게 백성들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스스로 거룩하게 준비하게 하셨다.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소리를 들으신 주께서 고기를 주 것이라고 하셨다.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한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고기를 먹이시겠다고 하셨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백성들이 주를 거절하고 출애굽한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모세는 주께 보병만 육십만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한달 내내 고기를 주어 먹게하시겠는지 여쭙는다. 아니 모세의 셈으로는 불가능 했다. (빈들에서 제자들처럼) 그러자 주께서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했느냐?” 하시며,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라고 하셨다.
모세가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린 영을 일흔 장로들에게도 내리셨다. 일흔 장로들도 예언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흔 장로들은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일흔 장로들 중 엘닷과 메닷은 회막으로의 소집에 응하지 않고 진 안에 머물렀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렸고, 그들도 진에서 예언했다. 이 사실을 한 소년이 모세에게 알렸다. 모세의 시중을 들던 여호수아가 이 일을 말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려 예언하는 것을 질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모세는 오히려 모든 백성에게 주님의 영이 내려, 모두가 예언자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세와 장로들은 진안으로 돌아왔다.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셔서 바다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 둘레에 떨어지게 하셨다. 진 둘레 하룻길 지역에 메추라기를 땅 위 두자 쌓이게 하셨다. 백성들이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다. 이튿날에도 메추라기를 모았다. 백성들은 모은 메추라기를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아직 고기를 먹기도 전에 주께서 백성에서 크게 진노하셨다. 백성에게 극심한 재앙을 내리셨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죽여 기브롯 핫다와라는 곳에 묻었다. 백성을 기브롯 핫다아와를 떠나 하세롯으로 행구하였다.

//여호수아의 질투? – 모세가 힘들다고하자, 주께서 일흔명의 장로들을 세우게 하시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을 나눠 주셨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긴 했지만 장막에 모인 예순여덟 장로 진중에 남았던 두명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리자, 그들은 모두 예언을 했다. 이 소식에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가 발끈?했다. 내심 이인자를 자처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예언을 하는 장로들을 그냥 두는 것은 마당하지 않다고 했다. 모세는 질투하지 말라고 여호수아를 꾸짖었다. 오히려 모든 백성에거 하나님의 영이 내리면 좋겠다고 응대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머무시는 것보다,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다. 물리적 임마누엘은 이 시공간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요구된다.)) 그런데 저자(모세)는 장로들의 예언은 일회적이었다고 토를 단다. 아마도 하나님과 말씀의 교제를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은 말씀을 마음에 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신다.
//구하는 대로 받는 저주? – 구하는 대로 받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다. 탐욕을 따라 구한 것을 받는 것은 더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구한 이번 사건이 그 예다. 백성에게 고기를 지겹도록 내려주시겠지만 한편으로 심각한 재앙도 보내셨다. 그러니 내가 구하는 대로 받으려고 고집하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성령)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질투와 탐욕을 버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7/03/21/

민수기 11:1-15

민수기 11:1-15

백성들이 주님께 들으라고 대놓고 심하게 불평했다. 주님께서 듣고 진노하셔서 그들 가운데 불을 내리셔서 진 언저리를 불태워 버리셨다. 백성이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요청했고, 모세가 주님께 기도드리자 불이 꺼졌다. 주님의 불이 그들 가운데서 타오른 그곳을 ‘다베라’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덩달아 또다시 울며 고기를 먹여 달라고 불평했다. 이집트에서는 생선을 공짜로 먹었는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도 맘껏 먹었는데, 이제는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이 떨어졌다고 불평했다. (노예 생활을 하면서 잘도 먹었겠다!)
(만나이 모양은 깟 씨와 같았고 브돌라와 같은 색깔이었다.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고 냄비에 구워 과자로 만들어 먹었다. 그 맛은 기름에 반죽하여 만든 과자 맛이었다. 만나는 진에 이슬이 내릴 때, 이슬 위에 내리곤 했다.)
온 백성이 고기를 먹여 달라고 모세에게 울며 불평하는 일로 주님은 대단히 노하셨다. 모세는 주님이 노하시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모세는 자신이 백성의 모들 불평을 짊어지는 것이 너무 힘들어 주님께 어찔할지 물었다. 자신은 불평하는 백성을 품고 갈 자신이 없다고 주님께 아뢨다.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하는 요구를 감당하는 것이 모세 자신에게 너무 무거운 문제라고 아뢨다. 모세는 자신이 주님의 눈 밖에 나서 이런 어려움에 처한 것이라면, 이 곤경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죽여 달라고까지 주님께 간청했다.

//불평!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불평을 모른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도, 지구 주위를 도는 달도 창조이래 챗바퀴 돌듯 주어진 일을 반복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에서 자꾸 이탈하려고 꾀를 낸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의 탐욕에 물들었다고 완곡히 표현하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을 했다. 사실 주님께 들으라고 대놓고 심하게 불평을 한 것이다. //모세는 이런 백성들을 위해 매번 하나님께 중보하느라 힘들었다. 드디어 이런 곤경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죽여달라고 주께 간청까지 했다. 예수께서는 불평분자 이스라엘 백성과 크게 다르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 곤경을 친히 담당하셔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셨다. 모세는 매번 중보의 자리에 나아가야 했으나, 우리 주님은 단번에 자신을 재물로 드리셔서 영원하 중보자가 되셨다. //탐욕이 불러오는 불평을 하지 말자. 대신 감사하자.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주님의 눈 밖에 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게 아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증거다. 그러니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것도 주님께서 함께 메어 주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7/03/20/

마태복음 28:1-20

마태복음 28:1-20

안식일이 지난 첫 날 동틀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천사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천사는 번개와 같았고 눈과 같이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죽은 사람처럼 꼼짝 못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들이 찾는 예수는,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했다. 천사는 예수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에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여자들은 무서뭄과 큰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 급히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때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안녕’하고 인사하셨다. 여자들은 예수의 발끝에 절을 했다. 예수께서 여자들에게 형제(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제사장에게 보고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 끝에, 경비병들에게 은돈을 많이 집어주고 그들이 잠든 사이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시켰다. 그들이 잠들었다고 총독이 추궁하면 경비병들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들으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했다. 제자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부활의 주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과 천사의 광채에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말씀이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두 마리아도 무서웠다. 그러나 ‘말씀 대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에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처음으로 만나주셨다. 무서움 대신 평안(샬롬)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천사를 통해 들려 주신 말씀, 성경 말씀.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꾸미려고 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는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아버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자 예수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가 , 다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셨다. 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신다. 제자들에게 삼위 하나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예수께서는 물리적으로는 하늘에 계시지만 말씀과 성령으로(기도로)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이유다. //마라나타!

민 28:16-31

(2017-08-10)

민 28:16-31

머리에 쏙 들어 오지 않는 것은 제사 뿐만아니라 절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키고 있지 않아서다. 부활절, 성탄절이 아니어서다.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절기들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사건과 연관이 있어 그래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유월절은 한마디로 문설주 피를 바름으로 장자들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무교절은 출애굽의 고생?을 기억하는 7일간의 명절이다. 칠칠절은 쉽게 유월절 이튿날부터 (무교절부터) 49일째 되는 날로, 유월절부터는 오순절이 된다. 칠칠절은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로도 불린다. 애고.

매일 아침 저녁을, 일주일에 안식일을, 한달에 초하루를 구별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듯이 오늘 본문은 일년에 며칠 몇 날을 절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어느 절기에서 날마다 드리는 번제 (상번제)를 드려야 했다. 결국 매일매일의 삶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26] 절기로 모이는 것에는 감사와 예배와 쉼의 원리가 들어있다. 칠칠절은 추수에 대한 감사. 성회로 모이는 예배, 그리고 일을 하지 않는 쉼.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흠 없는 것으로

사면초가

(2017-10-27)

사면초가 2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항우는 마지막임을 알고 부인 우희에게 ‘해하가’를 지어부른다.

산을 옮길 힘이 있고 세상을 덮을 기운이 있지만 /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항우의 애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리요 / 우희여 우희여 어찌할꼬

천하?를 양분하고 있던 항우의 마지막은 평생의 여인 우희에 대한 염려였을까? 아니면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을까? 어찌할꼬 묻는다. 하여간 항우의 ‘해하가’에 우희 (우미인)은 ‘화항왕가’를 지어 답했다.

한나라 군인이 이미 땅을 침략해서 / 사방에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리네 / 대왕의 힘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 천한 첩이 어찌 살리요

우희는 답시를 다 부르고 칼로 자결했다는 전설이 있다.

예레미야 심정에서 우희를 발견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앞에 사면 초가의 상황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상은 예레미야가 패역한 백성들의 조롱에 사면초가가 된 것이다.[10] 심지어 친구들까지 저들 편에 섰다. 오직하면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좌절의 심정을 토해낼까? ‘어찌 살리요’ 항우나 우희보다 예레미아의 상황이 더 심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해야 하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참고 인내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생과 슬픔을 보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 부끄러움이라는 조소를 [렘 20:18]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국도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움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후4:8 말씀이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길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나도 부끄러움을 너머 면류관을 본다.

나도 하나님을 바라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